마음에 와닿는 이야기

[스크랩] 단양 한드미 마을 정문찬 이장

정진공 2007. 11. 25.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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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일 (금) 00:26   프레시안

'귀향 이장'의 승승장구 스토리

<박원순의 희망탐사 46>단양 한드미 마을 정문찬 이장

 [프레시안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어머니에 곧잘 비유되는 고향은 넉넉하고 편안함 그것이다. 뜨끈한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 한 공기를 언제든 꺼내시는 어머니처럼 언제든 날 받아줄만한 곳이 고향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귀향(歸鄕)은 쉽지 않다.
  
  서울로 올라간 뒤 명절 때마다 한아름의 선물을 싣고 내려오는 이들에게 다들 성공했다고 말을 했다. 그에 비해 조용히 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서울생활에서 실패해 내려온 것 아닌지 하는 의심이 눈길이 보내졌다.
  
  마음속에 있는 고향, 그러나 다시 찾기 쉽지 않은 그 고향을 다시 찾은 사람들, 그리고 당당하게 귀향해 성공한 그들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일으켰다. 귀향과 그리고 귀향에서의 성공.
  
▲ 한드미마을 정문찬 이장. ⓒ희망제작소

  그 또한 귀향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귀향할 때부터 당당했고, 여전히 지금도 당당하다. 심훈상록수를 읽고 감동을 받으며 귀향을 생각하고 농촌운동을 계획한 사람, 돈을 벌면 고향에 가 내 뜻을 펼치리라 꿈을 품고 살아온 사람, 충북 단양군 한드미 마을의 정문찬 이장이다.
  
  처음부터 농촌 부흥의 꿈을 안고 귀향한 그는 무진장 노력했다. 많은 시련과 오해를 이겨내고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의 성공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성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마을일에 여전히 집중하고 있다. 수많은 강연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마을의 일에 몰두해야 한다면서 밖으로 다니기를 거부한다. 서울시장보다 작은 마을 이장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는 서울시장보다 더 훌륭한 마을 만들기 지도자이다.
  
  귀향해서 이장까지 되다
  
  그의 귀향은 두 번째다. 처음 귀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이다. 젊은 패기를 가득 안은 채 농촌운동을 하겠다는 포부로 고향을 찾았다. 30년 전인 1978년의 일이다. 양계농사를 지으면서 농촌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양계농사를 망치면서 생계를 위해 다시 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처음 귀향 후 20년만인 1998년 고향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1998년도에 형님이 고향에서 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를 도와주기 위해 두 번째 귀향을 했어요. 형님의 그 사업이 잘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고향에 오기로 마음을 정하고, 부산 살림을 정리했기 때문에 고향에 오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어요. 물론 집사람 반대도 심했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고향을 다시 찾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었기에 내려올 수 있었어요. 집안 땅과 처갓집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이장도 맡았죠."
  
  이미 고향에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자신만을 생각한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고향인 이 마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기에 그는 이장을 수락했다. 그의 이장활동은 그의 패기와 젊음만큼이나 활발했다.
  
  "행정관청의 사업을 따서 이런 저런 사업을 했어요. 예컨대, 주차장이 없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목적 광장을 만드는 일과 같은 것들이죠. 이런 일을 하면서 눈이 트였구요 산촌종합개발, 녹색농촌체험마을 등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관이 집행하고 우리가 관리하는 정도이긴 했지만 마을에서 어떤 사업을 할지 계획을 세우고, 우리가 직접 운영하고, 프로그램도 진행하면서 농산물을 판매하는 등 주체적인 측면도 없지 않아 좋은 경험이 됐어요.
  
  알차게 진행을 하니까 주민들도 좋아했고 입소문도 타기 시작했죠. 행자부에서 실시하는 정보화마을에 대한 계획서도 냈는데 지정되었고 팜스테이마을 지정도 돈은 지원해 주지 않았지만 홍보가 잘되는 효과가 있었어요."

  
  한드미 마을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까지 방문한 한드미 마을
  
▲ 2005년 대통령의 마을 방문을 기념해서 만든 표지판. ⓒ희망제작소

  한드미 마을에 대한 소문은 청와대 담도 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드미 마을을 찾았다.
  
  대통령이 찾은 마을, 다른 사람들이 찾지 않을 리 만무한 일이다.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찾아왔다. 작은 마을이지만 2003년도에 2700명, 2004년도에 7000명, 대통령이 방문했던 2005년에는 1만7000명으로 방문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2만1000명이 한드미 마을을 찾아왔다. 올해 목표는 2만5000명이란다. 목표달성이 어려울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을이기에 대통령이 찾아왔을까 하는 궁금증에 찾아왔어요. 여러 마을을 한 덩어리로 묶어 권역별로 개발하는 농촌마을종합 사업에도 선정이 됐죠. 더구나 우리 마을이 중심이 됐어요. 5개리(자연부락으로는 14개)가 모여서 하는 개발 사업이고, 총 36개의 농촌종합개발 사례 중에서 우리의 진척률이 제일 높습니다. 이 사업은 모델이 아직 없는데 우리가 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거죠."
  
  하나의 모델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 어떤 사업의 모델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은 당연하다.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개발해야할지 많은 논의가 오갔다. 처음에는 무조건 아름답고 생태적으로라는 관점을 가지고 접근했지만, 조금 더 구체적이며 이 마을의 특색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컨설팅 하는 분들이 평가하는 점은 젊은이들이 많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주민들의 참여도가 높고, 참여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는 것을 높이 사더군요. 새로운 마을운동의 모델이라고. 그런 차원에서 견학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태마을이 미래의 방향이다-돌담 쌓고 잔디 덮고 전신주 묻는다
  
  "농촌개발사업은 아직도 진행형이기에 할 일이 많습니다. 하수, 오폐수 처리도 새로 해야겠고 길도 정리중이죠. 방향은 여전히 생태마을이에요. 생태마을이 대안이고, 미래의 방향임은 너무 자명하니까. 어떻게 차별화해서 생태마을을 제대로 만들 것인가가 문제이죠.
  
  시멘트 포장된 길을 걷어내고 잔디 까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새마을운동의 벽돌담을 모두 돌담으로 새로 만드는 것도 하고 있고요. 어떤 사람은 멀쩡한 것을 왜 뜯느냐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 때 하려고 노력중이에요. 오폐수관을 묻고 나니 전신주가 눈에 걸려 전신주 지중화 사업도 진행하고 있죠. 돌담 새로 쌓는 것, 잔디 까는 것이 전주 때문에 뒤로 미루어졌습니다."

  
  아직 진행 중이기도 하지만 이미 첫발을 뗀 생태마을로의 변신. 그러나 정문찬 이장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한다.
  
▲ 농림부가 지원한 농가민박 시설을 설명하는 정문찬 이장. ⓒ희망제작소

  "지금 우리 마을이 아직 친생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동안 많이 달려왔지만 앞으로도 한참 달려가야 하죠. 지금까지 7년째 왔는데 마을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친환경농사도 처음에는 나만 지었지만 지금은 100% 모두 우렁이농법을 씁니다. 제초제도 거의 안하려고 노력하구요.
  
  앞으로도 권역사업을 하는 가장 큰 목표가 이 골짜기 전체를 청정구역으로 만드는 것이에요. 이 계곡을 살리기 위해 오폐수가 유입되지 않도록 한 거죠. 우리 마을은 이미 했고 다른 동네도 진행할 겁니다. 한드미 마을이 여기까지 오는데 7년이 걸렸으니까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겠죠."

  
  시간에 쫓겨 사는 우리지만, 어떤 일을 관철시키기 위해, 궁극적으로 삶을 누리기 위해 시간을 투입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드미 마을의 7년과 앞으로의 7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들처럼 말이다.
  
  농촌종합개발사업에 몰두하다-5개리(14개 자연마을), 한곡(큰 골짜기, 소백골)을 바꾼다
  
  들어가는 시간만큼 노력 또한 크고 깊다. 매주 한 번씩 농촌종합개발사업의 대상지역인 5개리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권역회의를 한다. 하지만 의견 모으기가 쉽진 않다. 그의 말처럼 화투치다가 다투면 겨울 내내 경로당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시골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계속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수고는 필수적이다.
  
  "그나마 쉬웠던 것은 한드미 마을이 4년 정도 하면서 돈 버는 것을 봤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바뀌었고, 우리 마을을 좋은 모델로 생각한다는 거죠. 내가 권역사업을 제안했더니 쉽게 동의를 했지요. 그 사업이 확정되고 나서 5개 행정리에 설명을 하러 다녔습니다. 한번 다니면 매일 5일씩, 밤마다 5시간씩 서서 설명했어요. 5개리를 다 돌고 나니 몸살이 나더군요. 하지만 수고스럽지 않았어요. 꿈이 현실이 되어가는 길목이었으니까."
  
  곧 각 마을에서 5명씩 참여하는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장만 참여하는 형식이 아니라 마을의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열린 구조로 이뤄졌다. 만나서 하나의 의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논의는 난상토론이 되지 않도록 생산적 논의를 유지해갔다. 그린투어리즘, 축산, 유통, 산림 등의 핵심적 이슈는 분과를 만들어 별도의 토론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를 안은 채 끌고 갈 수는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정문찬 이장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선은 정책을 이끌어갈 이장, 반장들을 정확히 이해시키고, 그들이 주민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와 더불어 교육을 병행했다. 교육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가장 정확한 길이기도 하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해서 시가현, 에치젠, 후쿠이, 도야마 등 일본의 산촌지역 견학 갖다오고 나더니 사람들이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았죠. 그 외에도 매주 목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외부강사를 초청해 리더교육도 받았고 국내 선진지로서 횡성 한우마을, 밤두둑, 고라데이(골짜기)마을 등으로 견학도 갔어요. 주민동기화 교육이라 해서 권역의 310가구 767명을 농협강당을 빌려 6회에 걸쳐 1박2일씩 세 번 교육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스톱까지 치면서 마을 어른들과 어울린다
  
▲ 한드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희망제작소

  교육의 중요성은 너무 잘 알지만, 교육이 효과를 거두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좋은 교육프로그램이 만들어져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교육을 들어야 한다. 바쁜 농사일에 꼬박꼬박 교육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정문찬 이장이기에,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처음 교육을 하면 한 세 번 정도는 예의로 잘 나와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 안 나온다는 거지요. 그래서 방법을 강구했지요. 경로당, 회관 등을 겨울에 난방비 때문에 닫아놓고 있는데 쌀을 내놓았더니, 김치만 있으면 밥을 해서 거기서 먹을 수 있으니 사람들이 모이더군요. 나중에는 닭발, 닭똥집, 돼지고기들을 부탁해 가지고 와서 방송을 했어요. 먹을 게 있으니 다들 나오시죠. 나중에는 경로당에 나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어요.
  
  나도 거기에서 끼어 한마디라도 거들기 위해 일부러 고스톱을 배웠습니다. 젊은 놈이 고스톱까지 쳐드리니 다들 좋아하시죠. 그러다가 그 자리를 통해서 회의하고, 교육하고 그러면서 이해를 얻어 갔습니다. 이제는 내가 한다고 하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해보라고들 하죠."

  
  마을 사람들의 힘이 한데 모이니 일이 잘 될 수밖에 없다. 노대통령이 올 때쯤에는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다 사업에 참여했단다. 다른 마을에서 깨기 힘든 기록이다. 절의 스님과 교회의 목사들이 한데 모여 마을일을 고민했으니 당연하다.
  
  마음에 없는 소리 할 때가 제일 힘들다
  
  하지만 모든 것이 승승장구,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고민이 있었다. 정 이장이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을까 궁금했다.
  
  "어려울 때야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죠.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건 마을 사람들이 마음에 없는 소리 할 땝니다. 시골의 모든 리더가 다 겪었을 법한 일이죠. 돈이 들어오면 얼마를 먹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배불리기 위해서 이런 사업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그런 소리 듣고 일하고 싶겠어요? 그래도 일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어요. 그런데 몇 차례 그런 일을 겪으면서 보니 스스로만 깨끗하면 한 달이면 진실이 밝혀지게 되더라고요. 나만 떳떳하면 된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지금은 거의 초월하고 살아요."
  
  같이 해주는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사람들이 등을 돌릴 때 가장 힘들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결국 초월할 때까지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하면서 그는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키고 원하는 사업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왔다. 주민간의 관계만 회복하면 관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아무것도 아니다. 주민들이 밀어주면 저절로 해결되기 마련이었으니까. 정 이장은 이 모든 것이 복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 복은 절로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스스로 갈고 닦아 만든 행운이다.
  
  그 다음 꿈은?
  
▲ 한드미마을의 교육시설 - 교육의 힘이 한드미 마을의 힘이다. ⓒ희망제작소

  현재 하고 있는 농촌종합개발계획을 끝내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앞으로의 꿈인지를 물어보았다. 단연코 그는 앞으로의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단지 지금의 일을 더 충실히 하련다는 뜻만 전한다.
  
  "다른 꿈은 전혀 없어요. 권역사업도 아직 멀었는데요. 뭔가 꼬투리를 잡기 위해 나온 것 같이 철옹성 같던 분들이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견학을 다녀오고 서로 대화하면서 완전히 달라져 있음을 지금은 알 수 있죠. 그런 일들이 저는 너무 뿌듯해요. 그래서 다른 꿈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아요. 5개리의 5명씩 함께 모여 하다 보니 신도 나고, 과거에 한드미 마을의 경우에는 나 혼자 어렵게 했는데 30여 명이 권역 일을 함께 하다 보니 성공도 확신합니다. 저는 주민들과 이렇게 회의를 통해 뜻을 합하고 하는 일이 너무 좋아요."
  
  신나서 하는 일이다보니 결실도 크다. 농사짓는 방법에서부터 산림개발의 방식에 대한 합의도 이뤄졌다. 군에서도 국유림, 군유림도 임대해 주겠다는 화답이 왔다.
  
  한드미 마을이 벤치마킹 대상이 되듯 이 마을을 가꾸어놓은 정 이장에게도 외부 강연요청이 많다. 하지만 마을일에 몰두해야한다는 생각에 강연요청을 거부하고 있는 정 이장이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마을을 와주길 요청한다. 자기의 말보다는 한번 마을을 보는 것이 더 좋으리라는 판단도 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마을이 더 알려질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생각의 뒷 편에는 조금의 강연료라도 오해를 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괜히 조금의 강연료 가지고 오해도 받는다. 리더의 힘이 크다는 것을 정문찬 이장을 보며 새삼 느낀다.
  
면담일시 - 2007년 6월 18일
  면담장소 -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2리 298
  면담장소 - 정문찬(한드미마을 이장)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richkh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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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단양 한드미 마을 정문찬 이장
글쓴이 : 반철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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