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는 이야기

전용복:나는 조선의 옻칠쟁이 이다....

정진공 2008. 6. 17. 15:50
옻칠 장인 전용복 / 옻칠로 그려낸 천 년의 빛 옻칠공예

2008/02/08 09:17

복사 

지난 25년의 세월 동안 옻칠 작업에 혼을 뺏기고, 일본에 세계 최대의 칠예 미술관 ‘이와야마 칠예 미술관’을 설립한 옻칠 장인 전용복.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의 <전용복 칠예전>에서 잃어버렸던 우리 전통 옻칠의 영롱한 천 년 빛을 다시 찾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영롱한 빛깔이 사방에서 가득 뿜어져 나온다. 어떤 물감이나 페인트로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은은하고도 그윽한 빛깔이 온 세포를 간질이는 듯 살아 꿈틀댄다.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열리고 있는 <전용복 칠예전>을 둘러볼 때의 일이다. ‘옻칠’이라고 하면 어린 시절 엄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는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나전으로 가득한 검은 옷장이 떠올랐더랬다. 그런데 그것은 옻칠에 대한 편견일 뿐 옻칠로 수만 가지 빛깔도 더 낼 수 있다는 게 옻칠 장인 전용복의 설명이다.

“고구려 벽화가 오늘날까지 고운 색을 그대로 전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옻칠 덕분입니다. 옻나무는 제 몸에 상처가 나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수액을 내는데, 그걸 마르기 전에 추출해 낸 다음 거기에 바위 가루나 황토 같은 천연 염료를 섞어서 갖가지 색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 빛깔은 5천 년이 가도 변하지 않아요. 쉽게 부패되거나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옛 무덤에서 출토된 옻칠 작품만 해도 그 형태와 빛깔이 그대로인 겁니다. 사실 수백 년 전에 그려졌다는 ‘모나리자’ 같은 서양 명화도 현대에 와서 다시 복원한 것이지 예전 색감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 보기 어렵잖아요.”

그는 옻칠의 갖가지 매력에 대해 전시장에 오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붙들고 목이 아프도록 설명한다.전용복은 현재 일본 동북부 지역에 위치한 모리오카(盛岡) 작업실에서 17년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칠예작가다. 지난 5월에는 그곳에 ‘이와야마(釜山)’라는 세계 최대의 칠예 미술관을 개관, 우리의 전통 옻칠 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이와야마’라는 이름의 한자를 우리식으로 읽으면 ‘부산’이 아닌가. 미술관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일본에서 활동하면서도 그가 고향인 부산을, 조국인 한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이 땅이 아닌 일본에서 활동해 온 까닭은 무엇일까.
“나전칠기가 꽃을 피운 고려 시대나 다양한 칠기 제품을 만들어 쓰던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실 우리의 옻칠 문화는 그 역사와 전통이 아주 오래되었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후세 사람들이 선조들의 이 아름다운 문화를 지키지 못한 거죠. 우리가 이를 외면하는 동안 일본으로 건너간 옻칠 문화는 환대를 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일본을 뜻하는 영어 ‘Japan’을 소문자 ‘japan’으로 쓰면 옻칠이라는 뜻이 될 만큼 일본에선 옻칠 문화가 세계적으로 발달해 있어요.”

부끄러웠다. 물론 우리 문화가 세계로 멀리 뻗어나가는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그가 일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가 그를 보낸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짠해 왔다. 옷소매 사이로 보이는 상처투성이인 그의 팔뚝은 힘겨웠던 지난날들의 아픈 생채기다. 매일같이 옻이 올라 붓고 진물이 난 상처는 아물 날이 없다고 한다. 그 상처 속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묵묵히 장인의 혼을 불태웠던 인고의 세월이 더불어 새겨져 있다.

옻나무 한 그루에서 한 컵 정도의 수액을 채취하기 위해선 우선 20년 가까이 옻나무를 키워야 하고 5일 동안 하루 스무 번에 걸쳐 아주 조금씩 수액을 받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그 옻나무는 밑동을 잘라 다시 싹이 돋을 때까지 또 십수 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얻은 수액은 공기에 닿기 전에는 투명한 빛을 띠는데, 여기에 갖가지 천연 염료를 섞어 고운 빛깔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옻칠 작품 하나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 6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 ‘만 가지 생명들의 합창’은 목재 제기(祭器) 위에 갖가지 색깔의 옻칠을 덧입힌 작품으로, 오묘한 옻칠 빛깔의 진수를 보여준다. 마치 온 우주의 만물이 아우성치듯 제각각 다양한 빛깔로 생명력을 지닌다.


일본 속에 우뚝 선 조선 칠쟁이

어린 시절부터 그는 그리고 만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나뭇가지와 깨진 항아리를 주워 와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나름대로 작품 이름을 붙여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을 시절,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구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 제 손으로 직접 가구를 만들어 보기로 하고, ‘예린칠공예사’라는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일곱.

“어느 날 공방으로 일본인 한 명이 찾아왔어요. 낡은 옻칠 밥상을 들고 와서는 새것처럼 복원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더라고요. 자세히 보니 그 기법이 우리의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어진 거더군요. 새로 손을 본 밥상을 보여주니 그 사람이 무척 만족해 하면서 도쿄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 복원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죠.

메구로가조엔 복원 작업은 목숨을 건 사투였습니다. 복원 기간만 3년이 걸렸고 복원 작품만 5천여 점, 사용한 옻칠만 10톤에 이르렀죠. 밤낮으로 전 직원이 그 일에 매달렸고 잠시 잠이라도 청할라 치면 마치 시체처럼 피곤에 떨어지던 나날들이었죠. 옻이 올라 온 몸이 퉁퉁 부어오르고 살갗이 벗겨진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문둥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훗날 그를 칠예작가의 반열에 올려준 것은 재미있게도 작은 밥상이 인연이 된 셈이다. 메구로가조엔은 일본 국보급 문화재로 인정받는, 유서 깊은 대규모 연회장으로 그 내부가 정교한 옻칠과 나전으로 디자인돼 있다. 2백여 개에 이르는 방 하나하나가 모두 옻칠로 이루어져, 그야말로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빛나는 곳이다.

현재 그는 가구보다는 순수 작품 활동에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있다. 막연히 그림을 동경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이제서라도 이루고 싶어서였을까. 물감 대신 옻으로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예술 혼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오는 9월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용복 칠예전>은 그의 식을 줄 모르는 예술 혼을 또다시 엿볼 수 있는 자리다. ‘햇살’, ‘강과 풀’, ‘푸른 소리’, ‘잔영’, ‘고향’ 등 일련의 작품들은 평화로운 자연의 모습과 애틋한 그리움의 감정을 화폭 가득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한결같이, 그윽한 옻칠의 빛깔로 색을 내고 금이나 나전 등을 섬세하게 덧붙여 완성한 작품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옻칠의 다양한 표현 방법을 계속해서 연구 중이다. 최근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지칠(紙漆)’ 기법. 한지 위에 옻칠을 그려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 땅에 옻칠 문화가 뿌리내리고 튼실하게 자랄 수 있다면 평생 옻칠에 매혹되어 산 그의 인생이 전혀 외롭지 않다는 전용복. 지금껏 홀로 묵묵히 걸어온 그의 외길에 이제 우리 모두가 따뜻한 길동무가 되어주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