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만난 기쁨

임제어록 : 무위진인~주인공!! 잘 있는가!!

정진공 2013. 10. 7. 11:52

내 서재 속 고전

임제어록
임제 지음, 정성본 역주
한국선문화연구원 펴냄(2003)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기독교가 지배하는 서양 문명에서 신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기독교가 지배하는 이런 지적인 분위기에서 인간은 노예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자유와 힘을 되돌려주기 위해,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신이 죽었다면, 이 지상에 무엇이 남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다. 기독교의 신이 창조와 심판의 주체였다면, 이제 인간이 창조와 심판의 역할을 떠맡아야만 한다. 물론 잘못된 창조나 심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수정하는 것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점이 니체를 서양 문명에서 가장 탁월했던 인문주의자로 만든 이유가 아닌가?

하지만 니체가 말한 신을 굳이 기독교의 신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일체의 초월적 권위를 상징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니체의 거부는 국가 권력, 사회적 관습, 자본의 힘 등등 인간을 노예로 길들이는 일체의 힘에 대한 거부로 읽힐 수 있다. 놀라운 일은 “신은 죽었다”고 니체가 울부짖기 이미 1000여년 전에 동아시아에서 모든 권위를 제거하고 주인으로 서야 한다는 임제(臨濟, ?~866)의 사자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임제어록>(臨濟語錄)을 꼼꼼히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에서 임제는 스님들에게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죽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모를, 친척을 죽이라고 이야기한다. 자비를 궁극적 이념으로 삼아야 하는 스님이 어떻게 이렇게도 무자비하고 잔혹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임제가 죽이라고 했던 것은 부처라는 사람, 조사라는 사람, 나한이라는 사람, 부모라는 사람, 친척이라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일체의 외적인 권위였다. 임제가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노예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여 살려는 일체의 노예의식이 그가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생각해보자. 싯다르타의 말을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은 부모의 말을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싯다르타는 싯다르타일 뿐이고, 부모는 부모일 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는 나일 뿐이다. 이런 자각이야말로 싯다르타가 우리들에게 남긴 가르침,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유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이렇게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가르침을 깨달은 사람을 임제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임제어록>을 넘겨보자. “‘벌거벗은 신체에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어서 항상 그대들의 얼굴에 출입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거듭 살펴보아라.’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선사가 법당 아래로 내려와 그 스님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말해보라! 말해보라!’ 그 스님이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자 임제선사는 그를 밀치며 말했다. ‘무위진인, 이것이 무슨 마른 똥 막대기냐?’ 그러고는 임제선사는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무위진인!’ “어떤 자리도 없는 참다운 사람”,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군주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신하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부모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식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자본가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노동자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선생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학생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자리를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군주, 부모, 자본가, 선생이 가진 압도적인 힘이 무서워서 우리는 그들이 원하는 역할을 배우처럼 능숙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무서운 것은 이렇게 부득이하게 맡은 배역이 시간이 지나면, 마치 우리 자아의 일부분인 것처럼 우리에게 각인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군주, 부모, 자본가, 선생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화된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제 이해되는가? 어느 제자가 무위진인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자, 임제가 왜 그의 멱살을 잡았는지, 그리고 왜 무위진인을 “똥 막대기”라고 말했는지. 제자는 무위진인을 또 하나의 외적인 권위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 임제는 무위진인을 똥 막대기라고 바로 부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 누구도 똥 막대기를 권위로 받들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하듯이, 무위진인을 만나면 무위진인도 죽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 제자는 무위진인을 자신이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이상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무위진인마저도 외적인 권위로 변하여 제자들이 주인으로 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무위진인을 임제가 이야기했을 때, 그 제자는 당상으로 올라가 임제의 멱살을 먼저 잡았어야 하지 않을까?

“만나는 모든 것을 죽여라”
인간을 노예로 길들이는
모든 권위를 거부하란 뜻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일없이 똥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
이 순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내가 주인되는 삶을 시작하라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무위진인이 될 수 있다는 임제의 말을 너무 어렵게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자. 임제는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을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제어록>에서 임제는 우리에게 주인이 되는 방법을 ‘쿨하게’ 알려주고 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특별히 공부할 곳이 없으니, 다만 평상시 일없이 똥을 누고 소변을 보며,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누워서 쉬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다. 옛사람은 ‘외부로 치달아서 공부하는 자들은 모두 멍청한 놈들이다’고 하였다. 너희들이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신이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되어(隨處作主, 立處皆眞), 외부대상도 그것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똥이나 소변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나아가 우리를 노예로 부리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피곤하지만 쉬지도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같은 생물종인데도 서로 눈치를 보고, 마침내 눈치 보는 것이 내면화되는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검열로 점철되어 있는 삶이 어떻게 주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장 생리적인 것도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우리가 정신적이고 이념적인 면에서 주인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스스로 삶의 척도가 되지 못하고, 제 삶을 외적인 척도로 재단하는 데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셈이다. 이제 비겁함과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서야 될 때가 아닌가.

강신주 철학자

지금은 부당한 권력이나 반인간적인 자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하루라도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결의가 필요한 때다. 그러기에 앞서 소중한 내 삶은 한번밖에 없다는 투철한 자기애를 다질 필요가 있다. 오직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인으로서 살아야겠다는 결의를 다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당분간 우리는 임제의 사자후를 불편하지만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곳에서나 주인이 된다면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되다”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 여덟 글자를 가슴에 품고 말이다.

임제의 사자후를 듣다 보면 문득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자기 가슴을 두드리며 “주인공(主人公)! 잘 있는가!”라고 외쳤다는 스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깨달음을 얻은 스님마저도 항상 주인의 삶이 아니라 손님의 삶을 살까 두려워했는데, 평범한 우리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지금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노예로 살고 있는가? 내 서재에 꽂힌 <임제어록>은 아직도 서슬 퍼렇게 이렇게 묻고 있다.

강신주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