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와닿는 이야기

마곡사와 백범 김구 선생과의 인연 ( 백범명상길)

정진공 2014. 2. 15. 15:33

-백범 김구 선생님과 마곡사의 인연-

 

"... 48년 전에 출가한 승려가 되어 굴갓을 쓰고 염주 걸고 바랑 지고 출입하던 길로 좌우를 살펴보며 천천히 들어가니,

의구한 산천은 나를 반겨주는 듯하다.

법당문 앞에 당도하니, 대웅전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柱聯)도 변치 않고 나를 맞아준다.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글귀를 금일 자세히 보니,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却來觀世間)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猶如夢中事)

라고 되어 있다.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이 글귀는 과연 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옛날 용담스님(龍潭師主)에게 보각서장(普覺書狀)을 배우던 염화실(拈花室)에서 하룻밤을 의미심장하게 유숙하였다.

그날 밤 스님들은 나를 위하여 지성껏 불공을 올리었다. 1945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상으로 나를 환영하여 주나, 48년 전의 승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기념으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인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이 직접 쓴 자서전으로,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구는 17살 때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동학에 입문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했다.

 

21살 때는 국모의 원한을 갚는 거사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에 입산,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1897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안중근과 안명근 의사의 의거에 관여하였다.

 

1919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1939년에는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일기의 상편은 1929년 김구가 53세 되던 해에 상해임시정부에서 1년 정도 독립운동을 회고하며 국한문혼용체로

 

김인, 김신 두 아들에게 쓴 편지형식으로,

 

우리집과 내 어릴 적,기구한 젊은 때,방랑의 길,민족에 내놓은 몸등의 순서로 기록하고 있다.

 

 

하편은 김구가 주도한 1932년 한인애국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항일거사로 인해 상해를 떠나 중경으로 옮겨가며 쓴 것으로,

 

3·1운동의 상해,기적 장강 만리풍등의 제목아래 민족해방을 맞게 되기까지 투쟁 역정을 기록하고 있다.

 

임시정부 환국이나 삼남 순회 대목의 서술은 1945년말 정도에 첨부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상·하편 뒤에 붙은나의 소원은 완전독립의 통일국가건설을 지향하는 김구의 민족이념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백범일지194712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더우기 김구가 상해이후 중경까지 27년간 임시정부요직을 두루 지내며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본이란 것과

 

임시정부의 1차 사료인 동시에 독립운동사 연구 및 위인전기사료로 귀중한 자료이다.

 

 

 

 

끝으로 백범일지의 나의소원 중 3편인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를 옮겨놓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1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최고 문화 건설의 사명을 달할 민족은 일언이 폐지하면,

모두 성인(聖人)을 만드는 데 있다.

 

대한(大韓)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우리의 적이 우리를 누르고 있을 때에는 미워하고 분해하는 살벌·투쟁의 정신을 길렀었거니와, 적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을 때다.

 

집안이 불화하면 망하고, 나라 안이 갈려서 싸우면 망한다. 동포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우리의 용모에서는 화기가 빛나야 한다.

우리 국토 안에는 언제나 춘풍(春風)이 태탕(鋏蕩)하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 국민 각자가 한번 마음을 고쳐먹음으로써 되고, 그러한 정신의 교육으로 영속될 것이다.

최고 문화로 인류의 모범이 되기로 사명을 삼는 우리 민족의 각원(各員)은 이기적 개인주의자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을, 제 이웃을, 제 국민을 잘 살게 하기에 쓰이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남의 덕을 입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가족에게, 이웃에게, 동포에게 주는 것으로 낙을 삼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이른바 선비요 점잖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부지런하다.

사랑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즐거운 것은 남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네가 좋아하던 인후지덕(仁厚之德)이란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들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며,

촌락과 도시는 깨끗하고 풍성하고 화평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동포, 즉 대한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얼굴에는 항상 화기가 있고, 몸에서는 덕의 향기를 발할 것이다.

이러한 나라는 불행하려 하여도 불행할 수 없고, 망하려 하여도 망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의 행복은 결코 계급투쟁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끝없는 계급투쟁을 낳아서 국토의 피가 마를 날이 없고,

내가 이기심으로 남을 해하면 천하가 이기심으로 나를 해할 것이니, 이것은 조금 얻고 많이 빼앗기는 법이다.

 

일본의 이번 당한 보복은 국제적·민족적으로도 그러함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다.

이상에 말한 것은 내가 바라는 새 나라의 용모의 일단을 그린 것이어니와,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나도 일찍이 황해도에서 교육에 종사하였거니와 내가 교육에서 바라던 것이 이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70이 넘었으니, 직접 국민교육에 종사할 시일이 넉넉지 못하거니와,

나는 천하의 교육자와 남녀 학도들이 한번 크게 마음을 고쳐먹기를 빌지 아니할 수 없다.

 

김구(金九, 1876829(음력 711) ~ 1949626)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교육자·정치인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교육·계몽운동 중 일본 경찰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노동국 총판 등을 지냈다. 1921년 이후 사회주의에 입각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결별하고, 만주 사변 이후에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 내 여러 지역으로 임시 정부를 옮겨다니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2612월부터 1927년까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이후 국무위원을 거쳐 19403월부터 1948815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임시정부 법통 운동과, 이승만 등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481월부터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는 연하(蓮河), 처음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호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 자를 따서 지었다. 김구는 자신의 호인 백범의 유래에 대해서 "독립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은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원()을 표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1912)에 거북 ''()였던 이름을 아홉 ''()로 바꾸었다. 젊어서 동학교도 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을 얻은 승려였으며, 개신교 신자였던 김구는 후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죽기 전에 병자성사를 받았다. 천주교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황해도 해주(海州) 출신이다.

  .끝. 연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