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속에 단아하게 서있는 개암사 대웅전 뒤로 우뚝 솟은 울금바위가 올려다보인다.
↑ 단단해진 곰소만의 겨울 갯벌에서 주민들이 바지락을 잡고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사리의 썰물 때면 곰소만의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진다. 칼날 같은 추위 속에서도 바다에 기대 사는 주민들은 물때에 맞춰 갯벌로 나간다.
개암사 대웅전 뒤편에는 울금바위가 있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개암사의 일주문을 지나 솔숲 오솔길에 들어서 절집을 향하자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울금바위다. 오솔길이 끝나면 곧 대웅전에 이르는 돌계단이 나타나는데, 계단을 오르기 전 고개를 들면 계단 끝으로 산정에 우뚝 솟아 있는 울금바위부터 눈에 든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시야를 높이면 먼저 눈 쌓인 개암사 대웅전의 팔작지붕 처마선이, 이어 다포기둥을 버티고 선 들보가, 이어 오래된 시간이 묻어나는 기둥이 차례로 보이기 시작한다.
개암사가 창건된 것이 백제 우왕때인 634년. 대웅전을 마지막으로 다시 고쳐 지은 것은 그로부터 1000년쯤 뒤 조선 인조때인 1636년이다. 절집이 지닌 내력은 1400년이 넘는다지만, 정작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사연의 시간이라 체감은 덜하다. 그보다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웅전 건물이 400년의 시간을 지켜왔다는 것이 더 감회가 깊다. 단청이 다 지워진 절집의 기둥이며 문턱을 쓰다듬으면 '장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개암사 뒤편에 우뚝 솟은 울금바위는 그 아래 절집이 '개암(開巖)'이란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됐다. 기원전 282년 삼한시대.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세를 피해 이곳 울금바위 아래로 와서 왕궁을 지었다. 울금바위 동쪽의 왕궁을 묘암(卯巖)이라 했고, 서쪽을 개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아마도 울금바위의 비범한 모습에서 딴 이름일 터다.
그러곤 왕궁의 흔적이 다 스러지고 다시 90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변한의 땅은 백제의 땅이 됐고 울금바위 아래 왕궁이 있던 곳에는 절집이 세워졌다. 그게 지금의 개암사다. 절집은 1400여년을 이어왔지만 백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개암사가 지어진 지 26년 만인 660년 7월 백제는 패망했다.
# 개암사에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울금바위로 오르는 길
개암사에서 나한전 옆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울금바위까지는 700m 남짓. 밑에서 올려다보는 위세보다 길은 순한 편이다. 뽀드득거리는 눈밭을 밟으며 오른다. 눈길 옆으로 자라난 조릿대들이 성성한 초록빛이다. 외지인들이 자주 찾는 길이 아니라 눈 내린 숲길에는 몇 사람의 발자국뿐이다. 천천히 다리 쉼을 하며 오르자면 30분 남짓. 부지런히 오를 경우 20분쯤이면 무성한 조릿대 숲을 지나 산정에 우뚝 솟은 울금바위의 뿌리 쪽에 가닿는다.
아다시피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이었다. 그해 여름,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인천 덕적도에 상륙했다. 때맞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병력도 백제 동쪽의 국경을 넘었다. 모두 18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마지막 싸움이었던 황산벌 전투는 치열했으되 허망했다. 사비성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백제는 패망했다.
수도 사비성은 함락됐지만 한순간에 백제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니었다. 당시 백제의 인구는 620만명. 그 땅에 세워진 성만 200여개에 달했다. 변방의 백제 사람들도 사비성 함락 소식을 전해 들었겠지만, 소식 한 줄만으로 나라가 무너진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터였다. 나라의 패망으로 실의에 빠진 유민들은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자, 1만2000여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끌고 갔다는 소식을 들으며 분노했으리라.
나라가 패망한 슬픔을 딛고 백제부흥군이 일어섰다. 결과로만 보자면 부질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라 잃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실낱같았던 백제의 부흥을 믿었던 이들의 꿈과 희망이 거기 있었다. 부안의 주류성에서, 충남 예산의 임존성에서 낫과 쇠스랑만으로 성을 지키던 오합지졸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던 나당연합군의 수만 대군을 물리쳤던 힘도 여기서 나온 것일 터다.
그 백제부흥군의 자취가 울금바위에 남아 있다. 울금바위에 당도하면 바위 아래 큰 굴이 눈길을 붙잡는다. 자연 동굴은 아니고 오목하게 들어간 바위 아래를 쪼아내 만들었다.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이 기거한 굴이라 해서 '복신굴'이란 이름이 붙었다. 복신은 의자왕의 사촌으로, 승려 도침과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과 손잡고 부흥군을 이끌었다.
# 울금바위 뒤편의 주류성에서 무너진 꿈을 보다
울금바위까지 이어진 길은 바위를 돌아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을 택하면 능선을 타고 다시 개암사쪽으로 내려서게 되고, 오른쪽을 택하면 바위 뒤편의 능선을 넘어 무너진 성터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길을 따르면 울금바위를 성곽으로 삼은 성은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인적이 드물어 발목까지 쌓인 눈에 푹푹 빠졌다. 성터에 뒹구는 돌들도 모두 눈 속에 파묻혀 흡사 눈으로 쌓은 성처럼 보였다. 능선 너머로 온통 쌓인 눈으로 흰 도화지처럼 변한 부안의 들판이 펼쳐졌다.
무너진 성터는 주류성의 자취다. 주류성을 지키던 부흥군은 날로 세력을 확장했다. 사비성은 무너졌지만 백제와 신라의 진짜 전쟁은 그때부터였다. 662년에는 주류성 인근에서 신라군을 격퇴했다. 내친김에 사비성까지 공격에 나섰다. 그들이 꿈꿨던 백제왕국의 부활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무너졌다. 그것도 적이 아닌 안에서부터. 백제부흥군의 주요 근거지였던 예산의 임존성에서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장수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투항, 칼 끝을 거꾸로 잡고 부흥군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말았다. 주류성에서도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과 도침, 부여풍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무너졌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했고, 왕권을 위협하는 복신을 부여풍이 제거했다.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해 분란에 싸인 부흥군을 공격했다.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맞섰지만, 결국 당나라 군사의 화공으로 전멸했고 주류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백제 부흥의 꿈이 사그라지고 만 그때가 663년 9월이었다.
# 신라 사람 원효는 왜 패망한 백제 땅에 왔을까
울금바위 중턱에는 원효굴이 있다. 원효가 676년 개암사를 중창한 뒤 울금바위에 굴을 파고 은거했다고 전한다. 신라 사람 원효는 왜 백제의 땅인 이곳까지 왔을까. 주지실에서 찻잔을 기울이던 개암사 주지 스님은 "백제 유민을 다독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했다. 나라를 잃은 뒤 다치고 소외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이 땅을 진정한 하나로 만들고자 함이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거기서 원효가 주창했던 '화쟁(和諍)'을 본다. 원효가 말하는 화쟁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관점상의 쟁점을 모순적 대립이나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상응하는 관계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실의와 분노로 가득한 백제 땅으로 와서 높은 산과 깊은 계곡처럼 서로 다르지만 한데 어우러지는 세상을 구현코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울금바위 중턱의 원효굴에는 난간이 만들어져 있지만, 아슬아슬 벼랑에 있어 여간해서는 사람들이 발을 들이지 않는다. 특히 이즈음처럼 눈이 쌓여 있으면 먼발치서 올려다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부안을 찾았다면 변산반도의 해안을 따라 난 30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정이 제격이다. 그 길에 채석강과 격포, 내소사, 그리고 곰소만의 진득한 갯벌이 다 있다. 특히 곰소만 일대의 갯벌은 다른 계절보다 겨울의 쓸쓸한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멀리 물러간 갯벌 위로 바지락을 잡는 아낙들이 갯일을 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해를 받아 갯벌은 은박지처럼 반짝거렸다. 무채색의 풍경은 오래된 흑백사진과도 같았다.
멈췄던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평선을 이룬 갯벌 위로 눈발이 분분히 흩날렸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들른 곰소항에서 좌판에 생선을 올려놓고 팔던 아낙네가 투덜거렸다. "올해 눈은 참 징허게도 많이 오네." 그렇게 눈이 내린 위로 또 눈이 내려 덮이고, 그 위로 다시 폭설이 내리고 있다. 개암사 뒤편의 울금바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처럼….
부안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가는 길
개암사를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야 하는데, 줄곧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가는 방법도 있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천안 ~ 논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공주 ~ 서천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동서천갈림목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갈아타는 방법도 있다.
앞의 방법이 길찾기에 간명하다면, 뒤의 방법은 시간과 거리를 절약할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부안나들목으로 나가 부안읍내를 거쳐 23번 국도를 타고 상서면사무소를 지나 봉은삼거리에서 개암사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묵을 곳 & 먹을거리
부안에서 최고의 숙소는 단연 대명리조트 변산이다. 빼어난 전망이며 수준급의 시설, 관광지와 연계되는 편리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다. 특히 바다쪽 객실의 전망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훌륭하다. 리조트 내에는 뜨끈하게 물놀이 겸 사우나를 즐길 수 있는 아쿠아월드도 갖추고 있다. 리조트에서는 내소사와 새만금 등 부안의 명소를 다녀오는 버스투어도 운영하고 있다.
민박이나 펜션을 찾는다면 내변산쪽을 찾는 게 좋다. 내변산을 넘는 736번 지방도를 따라 군데군데 민박집들이 있다. 격포나 모항 등 해수욕장에도 민박이 흔하다.
격포항 일대는 횟집들이 많다.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은 격포 버스터미널 부근의 군산식당(063-583-3234). 백합을 찜과 탕, 죽으로 내놓는 백합정식(한상 2~3인 기준 6만원)이 가장 추천할 만하다. 1만원짜리 한정식도 제법 푸짐하다. 묵은 김치와 간장게장 등 밑반찬이 충실하다. 관광객이 뜸한 평일에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붐빌 만큼 인정받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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