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홍익대에서는 이상한 말들이 오갔다. 어떤 학생이 점심시간만 되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긴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초중고교처럼 여유가 없던 수업시간들 속 점심시간이었기에 발 없는 말은 한 학생을 유명 인사처럼 만들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소속이라고 했다. 도시계획을 전공하는 1학년 학생이며 점심시간이면 물만 먹는다고도 했다. 위로 누나가 있으며 5남매의 장남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시골서 방앗간을 하다 불이나 사경을 헤맬 정도로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서울서 양은그릇 장사로 형편이 나아져 집도 장만했지만 장남의 대학교 첫 등록금을 내주시고 돌아가셨다는 말도 들렸다. 어머니도 편찮으시다고 했다. 때문에 간신히 등록금만 내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어 쓰니 점심값을 아끼려 물을 마신다는 제법 근거 있는 이야기도 돌았다.
1월11일 정년퇴임 5년 전부터 가꿔온 경기도 이천의 소나무 수목원에서 만난 김의식(63·정안) 국토연구원 불교법우회 지도법사가 학창시절을 더듬다 입술을 뗐다.
“젊을 땐 배고픔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생활능력도 없고 휴학을 할까 하다 등록금 문제가 해결돼 학업은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점심시간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참선을 시작했는데 교수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소문이 나기도 했지요. 허허허.”
기독 성서와 바꿔 본 불서로 삼보 귀의
▲국토연구원 불교법우회의 참선 지도.
그가 “놀라운 경험”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잊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잘 못 먹고 지내던 터라 폐병까지 앓았지만 단전호흡과 함께 한 참선은 그의 병을 싹 낫게 해줬다. 그 후로 40년 넘게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참선은 사실 아주 우연한 계기에 그를 찾아온 불연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그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컸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던가. 그는 늘 가방에 기독교 성서를 넣고 다니며 읽었다. 헌책방에서 즐겨 책을 바꿔 읽던 그에게 문득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반야심경 강의’. 그는 서점 주인에게 기독교 성서와 교환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독교 성서는 불서보다 훨씬 잘 팔리는 책이었기에 서점 주인은 흔쾌히 책을 내줬다. 그 순간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불교에 흡입됐다.
“100번은 넘게 읽었습니다. 내가 찾던 진리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삼보에 귀의했습니다. 기독교 성서와 바꿔본 불서 한 권이 제 인생을 바꿔 놓은 셈이죠.”
그렇게 시작된 그와 불교와의 인연은 대학 시절 대불련 활동으로 이어졌다. 1968년 마곡사 수련대회를 다녀왔고 1000배를 회향하고 광덕 스님에게 계까지 받으며 신심이 굳어졌다. 수련대회 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에서는 “절 때문에 아비가 죽었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죽음과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 시절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가는 곳마다 법회를 만들어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기쁨으로 삼았다. 34사단에 입대한 그는 법회 설립을 발원, 목사인 군종참모에게 불교 법회를 요구했다. 법사가 없는 상황을 말하며 이리저리 내빼는 목사에게 그는 “법사는 알아서 할 테니 시간과 장소만 내어달라”고 말했다. 장소도 없다는 목사의 말을 끝으로 군종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사단장에게 A4용지 8매 분량의 글로 법회 설립을 부탁했다. 결국 현재 군종교구장 자광 스님을 모시고 여법한 법회를 열었다.
제대 후 직장에서도 그의 포교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국토연구원 전신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지역개발연구소 재직 시절 좋은 불서를 사다가 책 뒤에 성명, 접수일, 회람일 등을 적은 빈 칸을 만들어 불서를 돌렸다. 맨 처음 그의 이름을 써놓고 “불교에 관심 있는 분은 이 책을 보고 볼만한 분들과 돌려보라”고 적었다. 맨 끝에 읽은 이에게는 그에게 반납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소나무를 벗 삼아 참선하는 곳. --법사님께서 은행나무에 직접만드신 참선자리
3개월이 지나 돌아온 책 뒷면을 보니 20~30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렇게 10권의 불서를 회람했고, 불서를 본 국토연구원 직원들의 요청으로 송광사 포교당인 법련사에서 간소한 초파일 법회를 갖기도 했다. 지역개발연구소가 국토연구원으로 흡수 통합 된 후에는 화장실 포교를 시작했다. 매일 같이 화장실을 드나들면서 직원들에게 주말 일정을 물으며 성향을 파악했고, 능인선원 지광 스님을 법사로 최초의 불교 법회를 열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진 법회는 1982년 국토연구원 불교법우회 창립으로 결실을 맺었고, 그는 3대, 5대, 9대 회장을 맡아 이끌어 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안산에서 청소년 법회 지도법사를 맡았고 금강 1000배 모임을 만들어 재가자들의 금강경 독송과 절 수행을 독려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참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도 흡연이 자유로웠던 시절 직장에선 앉을 곳만 생기면 잠시라도 명상에 잠겨 서옹 스님에게 받은 ‘이뭣고’와 ‘어째서’라는 화두를 참구했다. 시시때때로 참선에 매진하는 그가 타고 다니는 차는 아예 ‘젠카(Zen car)’라고 부른다. 그의 이런 공덕에 조계종은 1회 포교사 자격증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종 법회의 산파였던 그는 그의 말마따나 ‘불교 골수’다. 그러나 ‘불교 골수’인 그도 한 때 깊은 회의에 빠진 적이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불현듯 불교가 대중을 설득하는 최면적인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불교를 떠나려 결심을 굳히던 시기, 누나에게 사실을 전했으나 누나의 한 마디가 그를 다시 수행에 매진하게 했다.
“만약 네가 원효 대사나 의상 대사처럼 수행했다면 그런 말이 나오겠느냐. 네 수행이 의상과 원효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누나는 확신한다. 너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청화 스님 유발 상좌로 출가 발원도
▲변하지 않는 대상은 없다는 게 진리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늘 가부좌를 튼 한 재가자의 수행향기는 진리를 거스를까. ‘귀의정사’에서 나서며 참선에 든 김의식 법사를 돌아봤다. 고요히 하얀 눈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소나무의 초록빛이 유난히 맑다.
흠칫, 그는 놀랐다. 참회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그에게 누나는 ‘불교로 뿌리내리게 해 준 은사’나 다름없다.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은사는 무주당 청화 대종사다. 장좌불와로 수행자의 사표였던 청화 대종사가 유발 상좌를 삼은 것이다. 지금도 이천 수목원에는 청화 스님에게 공부를 점검 받던 서신이 소중히 보관돼 있으며, 스님이 자필로 써준 ‘귀의정사(歸依精舍)’는 나무판에 새겨 걸어뒀다. 마음이 화락하다는 뜻의 ‘정안’ 법명도 1983년 1월21일 직접 청화 스님이 주셨다. 언젠가 출가의 뜻을 밝혔으나 “몸 출가는 마음 출가를 위해 하는 것이지 마음 출가가 된 재가자는 굳이 몸 출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청화 스님의 말에 단념하기도 했다.
그는 정년퇴임 후 이천 수목원 ‘귀의정사’에서 소나무를 가꾸며 참선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 부처님 제자 숫자만큼 1250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고요선원’을 운영할 꿈을 갖고 있다. 하필 소나무라는 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
“소나무는 소욕지족의 표상입니다. 수행자 입장에서 보면 항상 청정한 면도 닮을 점이지요. 늘 청정한 마음, 즉 부동심이 바로 불성이 아닌가요.”
변하지 않는 대상은 없다는 게 진리다. 바꿔 말하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얘기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늘 가부좌를 튼 한 재가자의 수행향기는 진리를 거스를까. ‘귀의정사’에서 나서며 참선에 든 그를 돌아봤다. 고요히 하얀 눈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소나무의 초록빛이 유난히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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