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LIFE 2020~2035

60이후에 가슴뛰는 삶을 살자.... 지금도 가슴뛰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진공 2015. 1. 10. 10:49

 
 

더 늙기 전에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바심이 생긴다

 

다행히 최근 다시

가슴이 뛰는 대상을 만났다

자본주의의 몰인간성과

폐해를 극복할 협동조합이다

“이번이 마지막 원고가 될 것 같습니다.” 담당기자의 문자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부인할 수 없는 해방감 때문이다. ‘이웃종교인 칼럼’에 글을 쓴지 어느덧 2년이 꼬박 흘렀다. 매달 원고 마감 시한이 다가올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난감해 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그저 스님들을 좋아해서 자주 어울렸던 것 밖에는 불교에 대해 깊이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참 용감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글에 대한 반응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 칼럼이 나가자 가까운 스님들이 일제히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해왔고, 모르는 분들에게서도 편지도 오고,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책 선물도 받았다. 놀라운 것은 종교가 달라도 이렇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마음을 열고 관점을 달리해 보면 종교간 경계가 있을 수 없고, 본질로 파고들면 한 뿌리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제 나이도 어느덧 60세. 다시 인생을 재정비해야할 시점이다. 그냥 편하게 65세 정년까지 퇴직금 계산하면서 노후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이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을 찾아 새 출발을 해야 할 것인가? 이미 몸은 낡아져서 여기 저기 탈이 나기 시작하는데 더 늙기 전에 가슴 두근거리는 일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바심이 생긴다. 안전한 노후를 염두에 두다보면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누운 살찐 고양이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니체의 강렬한 도발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우라. 우리는 운명이 평온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베수비오 화산처럼 가혹해지기를 바라야한다.” 니체는 험난한 운명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았나? 10년 넘게 쓴 자서전을 다시 훑어보니 꽤나 인생이 굴곡이 많았다. 비록 전쟁을 겪은 세대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적어도 흥미진진했다. 신학원 졸업하고도 사제가 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서품을 받고서도 6년은 제도권 밖으로 나가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사제 노릇을 하기에는 모든 게 부족했던 나의 품성이 문제는 문제였다.

뒤로 물러앉아 편안하게 노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이제부터 진짜로 사회의 진보와 변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설 것인가? 다행히 최근 다시 가슴이 뛰는 대상을 만났다. 자본주의의 몰인간성과 폐해를 극복할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사회의 약자들이 살아남기 위한 실제적 대안이고 나아가서 지역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변화 시킬 수 있는 현실적 실천방안이라는 사실에 감동한다. 아! 이래서 풀무학교의 홍순명 교장선생님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협동조합이라고 하셨구나. 벌써 30년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래! 이럴 때 예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예수에게 반한 이유는 그의 깨달음의 경지로 보았을 때 그는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똬리 틀고 앉아 진리를 설파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동시대의 위대한 지도자 세례자 요한이 당국에 잡혔을 때 그는 오히려 혁명의 기운이 휘몰아치는 갈릴리로 향했다. 내가 예수에게 반하는 이유다.

이제 나는 새로운 꿈을 꾸며 길을 떠날 차비를 한다. 내가 존경하는 도의스님이 이전에 몸소 보여준 것처럼.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고 만행에 나설 작정이다.

 

※ ‘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집필해주신 이웃종교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불교신문3069호/2014년12월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