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을 규탄하는 불교도들의 항의 집회가 있던 날, 나는 대천덕 신부님을 떠올렸다.
불교계의 규탄집회에서 기독교의 편향된 모습을 성공회 신부님이 대표로 사과했 듯, 그 역시 성공회 신부님이었다.
그러게 지난 8월 6일은 그분이 돌아가신지 6년 째 되던 날이기도 했다.
한국명 대천덕. 미국명 Reuben Archer Torrey 3세.
1918년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청소년기인 1933~34년까지 평양 외국인 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중국 연경대학(Yenching University), 데이비슨 대학(Davidson College; 남침례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y Seminary)에서 공부했으며, 남부 대학(University of the South; 성공회 신학교)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46년 2월 2일 성공회 사제서품(조지아 교구)를 받았다.
1942~1947년까지 단속적으로 선원생활도 했던 그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7년이었다. 그는 1957~1964년까지 성 미카엘 신학원(현 성공회대)을 재건립했고, 원장으로 봉직했다.
1965년 강원도 태백(당시 삼척) 하사미의 외나무골로 들어간 그는 그 곳에 수도원 공동체 '예수원(Jesus Abbey)'을 설립한다. 초기 12명과 함께 산비탈을 개간했고, 이후 평생 노동과 기도를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공동체로 키워낸다. 말년에는 원장의 위치도 내려놓고 설립자의 위치로서 예수원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2002년 5월 쓰러졌고, 그해 8월 6일, 84세로 영면한다.
한국을 존중했던 벽안의 신부
한 미국인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이전에 보인 말과 행동들이 떠올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교회에 꽤 이름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가 설립한 예수원은 지금 한해 1만여명의 방문하는 공동체로 한국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분이었다. 10여년전 그 분이 만들어 놓은 태백의 수도원에서 잠시 함께 살았었고, 그 이후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공회는 개신교에 속한다. 간혹 에배 의식이 카톨릭과 같아 혼동하는 분들이 계시더라.)
벽안의 신부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성공회대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구로구 궁동에서 성미카엘신학원(성공회대 전신) 재건을 위해 정착한 그는 마을 사람들과 융화를 위해 철저히 한국 전통을 존중했다.
상을 당한 집에 가서 두건을 썼고, 우리 전통 예법에 따라 베옷을 입으며 같이 아파했다. 미국식 기독교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한국민을 존중하는 그의 모습에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열렸다고 한다.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
이같은 태도는 예수원을 설립한 강원도 태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해지는 일화 하나.
어느해 예수원에 살던 청년들이 부근 마을을 지나다 마을 주민들이 꾸며 놓은 '성황당'을 보게 됐다. 그들은 예수원에서 기한을 정해 놓고 수도원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우상숭배'라고 생각한 이들은 성황당을 과감히 훼손했다.
하지만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그들이 대천덕 신부에게 들은 것은 꾸지람이었다. 대천덕 신부는 직접 마을 주민들을 찾아갔고,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말하면서.
미국에 가서 스님들 비하하는 말을 하는 어느 목사와는 전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성황당에 사과하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
미국인이었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도와 아랍을 공격하는 미국의 모습에 비판적이었다. 아랍을 폭격하는 미국의 행동에 "미국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호히 말하기도 했다. 아울러 예루살렘은 이스라엘만의 땅이 아니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어느 한쪽의 땅만이 아니기에 함께 공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소산물 땅은 하나님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기에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논리'는, 뒤에 언급할 그의 토지사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부분이다.
최근 촛불시위 발언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나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도 때때로 대천덕 신부님을 회고하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 예수원이나 책을 통해 대신부님의 영향을 공공연히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들 목회자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교회의 문제점을 거칠게 지적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 대천덕 신부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대천덕 신부라는 분이 교회적으로 워낙 큰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방면으로 끼쳐진 영향이 작지는 않겠지만, 구분해 본다면 앞선 목회자들은 주로 종교적 영성 등과 관련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토지를 통한 불로소득은 도둑질, '헨리 조지'를 소개하다
대천덕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헨리 조지'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했다. 경제학을 전공했거나 토지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헨리조지는 1839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다.
명저 <진보와 빈곤>을 통해 '모든 지대는 도둑질'이라고 규정하며 토지 문제의 심각성을 일찍이 고민한 사람이었다. 땅으로 얻는 불로소득에 막대한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 헨리조지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에 입각해 '자연에 의해 생겨난 땅은 하나님의 산물이기에 인간이 그것을 통해 불로소득을 얻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 대천덕 신부님의 인식이었다.
그래서 1984년 조직된 '한국헨리조지협회'의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과거 유시민은 그의 책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내용 중 '헨리 조지' 편에서 '헨리조지협회'가 종교인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것에 대해 놀라워 했다.
내막을 몰랐던 그는 헨리 조지가 신앙인이었다는 점을 결부시켰지만, 헨리 조지의 사상이 성경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토지정의시민연대'나 '성격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성토모)' 등이 바로 이 헨리조지협회의 다른 이름들이다.
부동산 문제와 불로소득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정신적 지주가 바로 헨리 조지와 더불어 대천덕 신부님인 셈이다. (대천덕 신부 역시 토지문제와 관련한 책을 쓰기도 했다.)
참여정부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도 바로 이 '조지스트'중의 한 사람이었다.
대천덕 신부의 저서
<오마이뉴스>에 부동산 정책 관련 예리한 글을 올리는 이태경 시민기자나 김윤상 전강수 교수 등이 대신부님과 함께 토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연구했던 인물들.
간간이 교계 목회자들을 향해 따끔한 일침을 날리는 고영근 시민기자 또한 이들과 같은 멤버들이다.
대천덕 신부는 생전에 항상 공의를 강조했고, 영성의 중요성과 함께 교회가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중요시 했다.
그는 한국 목회자들의 교인보다는 돈을 먼저 생각하고 제대로 된 공의를 말하지 않는다며, 늘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늘 가슴에 베를 달고 살았다. 한국교회의 잘못을 대신 회개하겠다는 의미였다.
영양실조 걸릴 만큼 검소했던 신부
한편으로, 대천던 신부의 일생은 늘 가난했다. 15년된 와이셔츠를 입고 다녔고, 작은 음식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이가 한입 베어물고 버리려는 깍두기를 재빨리 낼름 집어 먹던 이였다. (바로 앞에 앉았었기에 목격한 모습이었다. 난 그때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했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신부님의 재빠른 모습이 웃기기도 하면서...)
특히 그는 자신을 '신부님'이라고 따로 부르지 않기를 원했다. 권위 자체를 스스로 내려 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저 예수원에 사는 사람들이 동일한 호칭(형제 자매)로 남녀를 부르 듯, 자신 또한 아처 형제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물론 간혹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풍습상 어른에게 존대를 안하기는 어려운 일, 그래서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나 역시도 대신부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기 2년 전이었던 2000년.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돼 한번 위험한 고비를 맞은 적이 있었다. 강릉에서 진단을 받다가 상태가 안좋아 급히 서울로 날아왔고, 바로 신촌 세브란스에 입원해야 했다.
2000년 영양실조 입원했다 퇴원한 직후 대천덕 신부
그 때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녔던 나는 그의 상태를 알고 나서 차마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82살이었던 그는 '영양실조'였다. 영양이 극도로 부족해지면 심장 등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따로 먹고 싶은 것을 해 드리겠다는 '예수원' 사람들의 요구도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는 항상 모두 함께 모이는 공동식사에 나와 먹었고, 자신만을 위한 음식은 사양했다.
개인 자가용이 없었기에 태백에서 서울에 올 때는 늘 기차를 이용했고, 묵었던 곳은 종로5가 기독교100주년기념관 5층의 2만원짜리 숙소였다.
떠받들려지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는, 그 교만이 극해 달해 오만한 발언이나 일삼고 있는 요즘의 일부 목회자들과는 아주 차별되는 모습이었다.
성공회 신자인 한화 김승연 회장과 빙그레 김호연 회장이 재산문제로 다툴 때 이들을 화해 시킨 것이 대 신부님었다는 이야기는 내가 나중에 들은 사실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장례식이 열렸던 6년 전 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고 오래전 만남을 회상하며 헌화했다.
너무나 다양했던 사람들, 이름난 정치인과 기업가들도 있었지만 가난한 소시민과 어렵게 하루하루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며 눈물 흘렸다.
풀무원의 원경선 선생님부터 대신부님과 함께 살았던 초등학생까지 그를 추모하던 사람들은 모든 계층을 망라했다.
정의를 말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는 교회
대천덕 신부가 잠들어 있는작은 무덤
그 분이 떠나가신지 6년. 최근 교회의 모습은 대 신부님의 이야기를 많이 떠올리게 만든다. 생전에 여러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했고, 그를 보기 위해 예수원을 찾았다.
그들은 여러 질문에 알맞은 답을 해 주던 대천덕 신부의 모습을 기억하겠지만 대신부님은 뒷편으로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반성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글로 쓰고 책으로 이야기 했지만, 다들 그 부분은 관심없이 지나치는 것 같다"며 웃으며 이야기 하고는 했다.
'교회가 세상의 정의를 말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거나 도리어 방종하는 모습'이라는 대천덕 신부님의 지적. 내가 그 분을 좋아했던 이유였고, 존경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개독교 소리를 듣는 교회의 모습과 종교편향에 대한 불교계의 집회를 보면서, 그 분이 당시에 느꼈던 교회의 위기감이 내게도 깊이 스며들었다.
교회가 교회 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며,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는 태도.
과연 성경적으로 올바른 모습인지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제대로 고민해 봤으면 한다. 대천덕 신부님을 알고 있고 그 분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