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이야기

침묵의 기도실, 눈물과 함께 평안이 ~~~

정진공 2008. 9. 5. 22:17
침묵의 기도실, 눈물과 함께 평안이…


예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시온’ 건물. 손님을 맞는 부서와 숙소 도서실 찻집 등이 자리잡고 있다. 태백=오명철 전문기자

태백 산골 ‘예수원’ 2박3일 머물러보니…

예수원에 다녀왔다. 10여 년 전부터 꼭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 태백행 직행버스로 3시간 반, 터미널에서 다시 버스로 30분가량을 더 가 하사미분교 정류장에서 내린 뒤 20분가량 산길을 올라가니 계곡을 따라 담쟁이넝쿨이 울창한 돌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서양의 수도원 같은 풍경이다.

1965년 미국인 성공회 신부 대천덕(리벤 토레이·1918∼2002)이 오지 중의 오지였던 이곳에 세운 예수원은 ‘나보다 남, 개인보다 나라’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초교파 공동체. 매년 1만 명가량의 방문객이 찾아와 기도와 묵상, 노동으로 영성을 재충전한다. 정회원인 이곳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3개월의 수련생활과 2년의 고된 훈련 및 노동을 마쳐야 한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땅으로 인한 불로소득을 배격하며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를 수칙으로 삼아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중시한다.

손님부에서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제출하고 예수원 규칙에 따라 휴대전화를 맡겼다. 자동차 키도 보관해야 한다. 음주와 흡연은 물론이고 맨발, 반바지,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 노출 및 밀착이 심한 옷차림도 금지한다. 방문객은 오전 6시, 낮 12시, 오후 7시 반 등 하루 세 번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지만 신앙과 형편에 따라 헌금할 수도 있다.

생활은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는다. 기도 명상 산책 독서 노동 등 무엇을 해도 좋다. 예약은 예수원 홈페이지(www.jabbey.org)를 참조하면 되고 원칙적으로 2박 3일간씩만 머물 수 있다. 1박 2일 및 주말 방문은 불가능하다. 휴가철이 아니면 1, 2주 전 예약을 하면 된다.




처음에는 경치 좋은 곳이라 휴식을 겸해 오는 사람이 많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갈급한 기도 제목을 갖고 온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온 주부 이모(54) 씨는 “남편이 간암 말기라 병원에서도 더는 치료할 수가 없다고 한다. 남편이 회복되면 좋고 그렇게 안 된다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행복하게 하나님한테 가기를 기원했다”고 말했다. 조선대 의대 본과 4학년 정모(24) 씨는 “내년 1월 의사국가고시를 앞두고 장래의 진로와 비전에 관한 기도를 하기 위해 왔다. 좋은 이성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도 드렸다”고 말했다. 이 밖에 부부관계 회복, 전공인 피아노와 선교사로서의 사명 사이에서의 갈등, 아버지가 증권에 빠져 2억 원을 날리게 돼 고통을 받고 있는 딸, 직장 상사의 편견으로 인한 고통 등을 호소하는 이도 있었다. 침묵으로 기도하는 소기도실 휴지통은 눈물 젖은 화장지로 가득하다.

현재 예수원은 대천덕 신부의 부인인 현재인(제인 토레이·87) 사모가 대표로 돼 있고 아들 벤 토레이(60) 신부가 인근 삼수령 수련원에서 북한 선교에 대비한 훈련 및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현재인 사모는 다리가 다소 불편해 부축을 받을 뿐 손님들과 식사와 예배를 함께하는 등 건강한 모습이다. 대 신부 사후 예수원의 운영에 관해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그가 오래전부터 정회원과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시스템을 갖춰 놓아 큰 문제없이 6년여를 보냈다.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정회원은 30여 명. 한 정회원은 “하지만 아무래도 영적 멘터 역할을 하시던 분이 안 계시니 어쩔 수 없는 공백을 느끼곤 한다”고 털어놓는다.

4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토레이 가문의 간증은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는 시편 37장 25절 말씀. 예수원 측은 “재정자립도가 55%에 불과하지만 남에게 이를 알리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매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곤 했다”고 소개한다.

예수원 언덕에서 안식하고 있는 대천덕 신부의 비문에는 ‘하나님 나라의 개척자(A Pioneer in the kingdom of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처럼, 그는 썩어 한국 땅에 참으로 소중한 신앙의 열매를 맺었다.




태백=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