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 이야기

[스크랩]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先生) 유적공원(遺跡公園)

정진공 2015. 1. 22. 10:24

매천(梅泉) 황현(黃玹)선생(先生) 유적공원(遺跡公園)

 

매천 황 현 한말 마지막 선비로 추앙받은 우국지사 매천 황현선생은 1855년 12월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의 깊이가 더해지면서 한말 한문학의 4대 문장가(강위, 감택영, 이건창 ,황현)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매천은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도와 조정의 현실을 간파하고 고향인 광양과 구례로 낙향하여 그의 대표저서인 역사비평서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시문집인 「매천집」, 「매천속집」, 「동비기략」등을 저술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을 당하자 절명시를 남기고 56세의 일기로 자결하였다. 1999년 문화관광부의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그의 정신은 현재까지 후손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이 가옥은 조선말기 대학자요, 시인이자 우국지사였던 매천 황현 선생(1855~1910)께서 태어난 생가로 선생의 충절을 기르기 위해 2002년에 광양시에서 건립한 것으로,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한식 목조 초가지붕이다. 황현 선생이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호는 매천(梅泉)으로 황희정승(黃喜政丞)의 15대 손이며, 시골 선비였던 아버지 시묵(時默)과 풍천노씨(豊川盧氏) 사이에서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렸을 때 부터 시문에 능하여 29세(고종25년 1883년)에 특설보거과에 급제하였고 34세(1888년)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과 조정의 부패를 안타깝게 여기고 급제와 동시에 낙향하여 구례에 살면서 호양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진양성과 학문에 몰두하였다. 선생이 51세가 되던 1906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식민지 체제에 들게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여러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문변삼수(聞變三首)란 시를 지어 매국(賣國) 행위를 통탄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되자 일제에 항거하는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니 때는 1910년 음력 8월 7일 그의 나이 56였다. 황현의 저서로는 고종 1년(1864년)부터 한일병합(1910년)까지의 역사를 만년체로 서술한 매천야록, 매천집, 매천시집, 동비가략 등이 있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追敍)되었고, 1999년에는 당해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으며, 2005년 11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다. 

 

 

 

 

 

 

 

 

 

 

 

 

 

 

 

 

 

 

 

 

 

 

 

출처 : 정겨운 삶을 위하여 (G.U.Baek.)
글쓴이 : 백광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