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 글- 그 노래에 취하다 (맑은소리 맑은나라/2019년3월호) 조희창 - 듣고 쓰다
2019. 4. 22. 15:51
https://blog.naver.com/artmanmanjae/221519820525
그 노래에 취하다 3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
어릴 적에 나는 유별나게 눈물이 많았다. 슬픈 이야기와 슬픈 노래는 모두 내 눈물의 씨앗이었다. 특별히 한이 많은 가족사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들보다 눈물이 많았다. 그런데 그 당시에 경상도의 장남은 대놓고 울 자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사내자식이 그토록 눈물이 많아서야 어디에 쓰겠냐며 야단쳤다. 나는 최대한 눈물 흘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어보고 딴생각도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나 역시 그런 자신이 무척 싫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제야 눈물이 조금씩 제어되기 시작했다. 코 밑에 까뭇까뭇 수염이 올라온 것과 비슷한 진행이었다. 그렇게 눈물의 시대는 끝나나보다 생각했는데, 어럽쇼,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오십 줄에 이르게 되니 다시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돌아오는 것 아닌가. 이 길고 긴 눈물의 여정, 눈물의 복귀 현상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지금의 눈물과 어릴 적의 눈물은 몇 가지 다른 점이 포착된다. 첫째는 주위에 운다고 야단칠 어른이 없어졌다. 이건 그 자체로 꽤 쓸쓸한 일이다. 둘째는 눈물의 종류가 상당히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슬퍼서 우는 것뿐만 아니라 기뻐서도 울 수 있고 아름다워서도 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의 묘약’, 인간의 가장 오래된 판타지
사설이 길어졌다만, 이 노래는 제목으로만 보아도 누군가 무슨 이유로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그 스토리를 추적해보자.
때는 180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한 농촌 마을에 ‘네모리노’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다. 착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친구인데 그런 경우 대부분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만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다. 언감생심 마을 농장 지주의 딸인 ‘아디나’ 때문이다. 고상하고 예쁘고 똑똑하기까지 한 여인 아디나. 네모리노는 먼발치에서 그녀를 보며 애태울 뿐이다. ‘벨코레’라는 군인이 와서 아디나에게 청혼을 하는 장면까지 보고 있자니 네모리노는 미칠 지경이다.
이때 마을에 ‘둘카마라’ 박사로 불리는 돌팔이 약장사가 나타나서 마시기만 하면 100퍼센트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사랑의 묘약’을 광고하고 다닌다. 독일의 연애담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에서 이졸데가 마셔서 사랑에 빠지게 된 바로 그 물약이라고 허풍을 떤다. 네모리노는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에 이 약이라도 사서 먹고 싶었지만, 약을 살 돈이 없다. 그때 군에 입대하면 보상금을 준다는 말을 듣고 네모리노는 입대를 약속하고는 그 돈으로 이 약을 사 먹는다.
때마침 네모리노의 삼촌이 죽어서 그가 많은 유산을 받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처녀들이 네모리노에게 접근하는데 영문을 모르는 네모리노는 이게 모두 ‘사랑의 묘약’을 마신 약효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괜히 불안해진 아디나는 약장수로부터 네모리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과 그 때문에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아디나가 눈물짓는 것을 보며 네모리노는 이제 정말 약 효력이 나타났다고 기뻐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흐르네....오, 하늘이시어! 난 이제 죽어도 좋아요. 더는 바랄 게 없어요,” 물론 그다음은 해피 엔딩이다. 아디나는 네모리노의 입대 계약서를 찾아오고 두 사람은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고 떠들썩한 축하의 소리로 이 오페라가 끝난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이비 약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약품은 ‘사랑의 묘약’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등장하는 이 약품은 중세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가 되어 바그너의 오페라로 이어졌고,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도 등장해서 멘델스존의 극음악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4인조 그룹 <서처스>가 녹음해서 메가 히트를 기록한 노래 <Love Portion No.9>이라는 팝송도 사랑의 묘약에 관한 얘기다.
이 황당한 약에 관한 이야기가 왜 이토록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게 된 것일까? 그건 사랑의 역사, 사랑 때문에 번민하고 애태우는 역사가 유구하기 때문이다. 사랑 때문에 잠 못 들어본 사람이라면 ‘사랑의 묘약’이라도 구하고 싶은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이 오페라처럼 순진하지 않는다는 것, 씁쓸하게도 현실 세계에선 네모리노가 아디나와 맺어질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그러나 뒤집어 생각한다면 바로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사랑의 묘약’이라는 판타지를 그려내고 있다.
특히 오페라의 2막에서 네모리노가 부르는 이 아리아는 요즘 말로 하자면 ‘자뻑의 끝판왕’이다. 이보다 더 황당한 오해가 있을 수 없는데 드라마는 그대로 이어지면서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그 모든 시나리오상의 문제점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노래 때문이다. 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뭐, 어때? 그런 세상 하나쯤은 있어도 좋잖아?”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최고의 묘약 = 99%의 순정 + 1%의 용기
이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작곡가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1797-1848)가 만들었다. 도니제티는 오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빠른 속도로 작곡한 사람이었다. 그가 첫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열아홉 살 때였는데, 이후 1844년 마흔일곱까지 75편의 오페라와 650곡 정도의 여러 가지 음악을 작곡했다. 작곡 속도가 빠르기로 유명한 작곡가 로시니(Gioacchino Antonio Rossini, 1972-1868)가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를 15일 만에 작곡했다는 얘기를 들은 도니제티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래? 원래 로시니가 좀 게으르잖아.”
이 작품 <사랑의 묘약>도 단숨에 진행되었다. 대본작가인 펠리체 로마니를 찾아간 도니제티는 “2주일 이내에 새 오페라를 만들 생각이오. 그러니 1주일 내로 대본을 완성해 주시오. 자, 우리 능력을 보여줍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부랴부랴 만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흥행몰이를 했다. 이 오페라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메디다. 과거의 오페라는 대부분 ‘왕자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의 구도였는데 반해 이 오페라는 아름답고 지체 높은 여인과 가난하고 순박한 남자라는 구도로 남녀 역할을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그 순진남이 부르는 노래 멜로디들이 듣는 이의 가슴을 휘저어 놓는다. 사람들은 인간미 넘치고 신선하며 기분 좋게 만드는 이 오페라에 몰려들었고 그에 따라 도니제티의 인기도 폭발적으로 높아졌다.
<루크레치아 보르자>(1833), <마리아 스투아르다>(1834), <람메르모어의 루치아>(1835), <연대의 딸>(1840), <라 파보리타>(1840), <돈 파스콸레>(1843)로 이어지는 도니제티 전성시대가 이 작품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희극, 비극, 역사극, 전원극 할 것 없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니제티의 말년은 아름답지 못했다. 부인과 자식들이 일찍 죽었고, 도니제티 본인도 질병으로 고생했다. 원래 도니제티는 밀라노 바닥을 휩쓸고 다닌 멋쟁이였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어서 여인들이 모두 그에게 정신이 팔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그 탓에 사생활이 문란해졌고, 그 결과 매독이 온몸에 퍼져 말년엔 정신병원에서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싶다. 그냥 세상이 ‘남몰래 흐르는 눈물’처럼 아름답고 따뜻하게 흘러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만 하게 된다. “뭐, 어때? 그런 세상 하나쯤은 있어도 좋잖아?”
* 추천 영상
- 루치아노 파바로티, 캐슬린 배틀, 제임스 레바인 지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 / 0000연출 - 0000년
- 안나 네트렙코, 롤란도 비야손, 레오 누치, 알프레드 에쉬베 지휘,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 오토 쉥크 연출 - 2005년
Donizetti, <L'eisir D'amore> 'una furtiva lagrima’
Una furtiva lagrima negl'occhi suoi spunto: quelle festose giovani invidiar sembro; che piu cercando io vo? che piu cercando io vo?
M'ama, si m'ama lo vedo, lo vedo. Un solo istante I palpiti del suo bel corsentir! I miei sospir confondere per poco a'suoi sospir!
I palpiti, i palpiti sentir, confondere i miei coi suoi sospir... Cielo, si puo morir; di piu non chiedo, non chiedo,
Ah, cielo! Si puo! Si, puo morir! Di piu non chiedo, non chiedo. Si puo morire! Si puo morir d'amor.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남 몰래 흘리는 눈물’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흐르네. 유쾌한 아가씨들이 부러워하고 있네. 더 이상 뭘 바랄까? 더 이상 뭘 원할까?
날 사랑해! 그래, 날 사랑해. 난 알 수 있어. 이 순간, 그녀 가슴의 두근거림이 느껴지고, 내 한숨은 그녀의 한숨과 하나가 되네.
두근거림이, 두근거림이 느껴져 우리의 탄식은 하나가 되네 오, 하늘이시어! 난 이제 죽어도 좋아요. 더는 바랄 게 없어요, 아무것도.
오, 하늘이시어! 난 이제 죽어도 좋아요. 더는 바랄 게 없어요, 아무것도. 죽어도 좋아요, 사랑으로 죽는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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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니제티가 1932년 밀라노에서 <사랑의 묘약>을 초연한 이후, 이 오페라는 모든 테너들이 한 번은 꼭 불러야 하는 곡이 되었다. 특히 서정적인 음색을 가진 리리코 테너들에겐 필수 레퍼토리이다. 1920년 브루클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당대 최고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피를 토하면서 내려온 마지막 무대가 바로 이 오페라였다. 1988년 8월 24일 베를린의 도이치오퍼에서 공연된 <사랑의 묘약>에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열연했다. 공연이 끝난 뒤 파바로티는 무려 1시간 7분 동안 167회의 박수 세례(커튼콜)를 받아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2005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선 멕시코 출신의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네모리노 역을 맡았는데, 이 곡을 너무 잘 불러서 중간박수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한 번 더 불러 주고서야 극이 진행된 일도 있었다. 모두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낳은 신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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