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해변에서 만난 연인처럼

아버지의 바다...

정진공 2007. 3. 15. 21:10
한국의 효자들] "내 눈은 아버지의 눈… 내 손도 아버지의 손"
눈먼 아버지 위해 대학 그만둔 김연용씨… 고향 지키며 고기잡이 모습 카메라에 담아

‘경운기를 몰고 아버지를 마중 나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심코 경운기 뒤쪽을 돌아보았는데, 아버지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앉아 계셨다. “아버지 뭐하세요?”“기도해.” “무슨 기도?” “경운기 사고 없이 무사히 데려다 달라고 말이야.” 난 지금까지 내가 운전을 잘해서 사고 없이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보니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옹진반도 끝 작은 섬 선재도에 사는 김선호(63)씨는 장님 어부다. 그의 아들 김연용(29)씨는 몇 년째 아버지의 눈이 되어 외딴섬의 바닷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다니던 대학도 포기했다. 10리나 떨어진 개펄 밖 어장으로 이어진 줄에 갈고리를 걸고 혼자 바다로 나갔던 아버지를, 일이 끝날 때쯤 마중 나가 경운기에 태우고 돌아오는 일은 그의 중요한 일과가 됐다.


▲ 아들 김연용씨가 고기잡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 김선호씨와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제가 뛰어나가서 그물을 걷어올리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을 아버지가 몇 시간씩 걸려서 하시는 것이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답답해하시는 아버지를 쉬시게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삶을 지켜드리는 겁니다.”

대장장이이자 목수였던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김연용씨가 대학입시에 실패한 1995년 무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에 불이 나 다 타버렸다. 인천에서 재수 중이던 연용씨는 학원을 뛰쳐나와 선재도행 배를 탔다. 친구 몇 명을 불러 모아 함께 집을 짓기 시작한 지 몇 개월. 그해 8월 집이 완성됐다.

겨우 들어가 살 집은 마련됐지만 무서운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아버지는 여전히 걱정이었다.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았고 아버지는 “병을 키운다”며 큰 병원에 가는 걸 싫어했다. 어린 연용씨에게 뾰족한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몇 달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벼락치기로 미술 공부를 해 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선재도에서 매달 보내오는 50만원의 생활비는 연용씨에게는 늘 불평거리였다. 1년에 한 번 정도 들르셨던 아버지가 선재도로 돌아가실 때였다. 여느 때처럼 연용씨에게 굳이 연안부두행 버스 번호를 물었다. 연용씨는 “5000원밖에 안 한다”며 택시를 타고 가시라 했지만 아버지는 버스가 편하다며 굳이 버스 정류장을 두리번거렸다. 연용씨가 “끼익” 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눈이 잘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버스 번호판을 살피려 도로로 나서다 사고를 당할 뻔한 것이었다. 앞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가 뜨거운 화로 앞에서 허리가 휘도록 망치질을 해서 보내주신 학비를 투덜거리며 헛되이 써버렸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연용씨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집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늘 불안하고 답답한 것 뿐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시력이 절망적인 상태로 가고 있다는 것은 연용씨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일등병으로 진급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완전 실명 소식이 날아왔다. 대장장이로, 목수로, 운전사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삶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 김선호·연용씨 부자와 애견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