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해변에서 만난 연인처럼

아버지의 바다

정진공 2007. 3. 13. 21:18

멀리보이는 섬들
그리고 물이 빠진 갯벌
주인잃은 바다

..


이미 아버지의 바다는 아니었다




늘 고기를 잡고 돌아오던 집
이제
아버지의 바다에
아버지는 없었다




길을 바꿔
그리멀지 않은 제부도엘 들렀다
그사람이랑 들러본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했지만
다시보는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다



역시 바람이 거센탓인지
바다는 진한 갯벌의 색을 띠고...



누구인지 모르지만 태양을 향해 몇번인가 셔터를 누르던 사람
열심히 lcd를 확인하는 모습
추운 날씨에도 다정하게 보이던 애기를 데리고 왔던 부부
멀리 당진화력발전소도 보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또하나의 일상

바람이 불지않는 착한날에 다시한번 가보고 싶은곳
주인은 바뀌었지만 TV를보며 가슴찡했던 기억이아직도 생생한
대부도옆 선재도 바다향기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 - 패닉
..................


퍼온글 첨부

한국의 효자들] "내 눈은 아버지의 눈… 내 손도 아버지의 손"
눈먼 아버지 위해 대학 그만둔 김연용씨… 고향 지키며 고기잡이 모습 카메라에 담아

‘경운기를 몰고 아버지를 마중 나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심코 경운기 뒤쪽을 돌아보았는데, 아버지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앉아 계셨다. “아버지 뭐하세요?”“기도해.” “무슨 기도?” “경운기 사고 없이 무사히 데려다 달라고 말이야.” 난 지금까지 내가 운전을 잘해서 사고 없이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보니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옹진반도 끝 작은 섬 선재도에 사는 김선호(63)씨는 장님 어부다. 그의 아들 김연용(29)씨는 몇 년째 아버지의 눈이 되어 외딴섬의 바닷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다니던 대학도 포기했다. 10리나 떨어진 개펄 밖 어장으로 이어진 줄에 갈고리를 걸고 혼자 바다로 나갔던 아버지를, 일이 끝날 때쯤 마중 나가 경운기에 태우고 돌아오는 일은 그의 중요한 일과가 됐다.


▲ 아들 김연용씨가 고기잡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 김선호씨와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다.

“제가 뛰어나가서 그물을 걷어올리면 금방 끝낼 수 있는 일을 아버지가 몇 시간씩 걸려서 하시는 것이 가슴 아프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은 답답해하시는 아버지를 쉬시게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삶을 지켜드리는 겁니다.”

대장장이이자 목수였던 아버지가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은 김연용씨가 대학입시에 실패한 1995년 무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에 불이 나 다 타버렸다. 인천에서 재수 중이던 연용씨는 학원을 뛰쳐나와 선재도행 배를 탔다. 친구 몇 명을 불러 모아 함께 집을 짓기 시작한 지 몇 개월. 그해 8월 집이 완성됐다.

겨우 들어가 살 집은 마련됐지만 무서운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아버지는 여전히 걱정이었다.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았고 아버지는 “병을 키운다”며 큰 병원에 가는 걸 싫어했다. 어린 연용씨에게 뾰족한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몇 달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벼락치기로 미술 공부를 해 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선재도에서 매달 보내오는 50만원의 생활비는 연용씨에게는 늘 불평거리였다. 1년에 한 번 정도 들르셨던 아버지가 선재도로 돌아가실 때였다. 여느 때처럼 연용씨에게 굳이 연안부두행 버스 번호를 물었다. 연용씨는 “5000원밖에 안 한다”며 택시를 타고 가시라 했지만 아버지는 버스가 편하다며 굳이 버스 정류장을 두리번거렸다. 연용씨가 “끼익” 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눈이 잘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버스 번호판을 살피려 도로로 나서다 사고를 당할 뻔한 것이었다. 앞도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가 뜨거운 화로 앞에서 허리가 휘도록 망치질을 해서 보내주신 학비를 투덜거리며 헛되이 써버렸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연용씨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집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늘 불안하고 답답한 것 뿐이었다. 특히 아버지의 시력이 절망적인 상태로 가고 있다는 것은 연용씨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일등병으로 진급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완전 실명 소식이 날아왔다. 대장장이로, 목수로, 운전사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아버지의 삶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 김선호·연용씨 부자와 애견 '바다'

세상과의 거리감이 가장 힘들어

2000년 5월 제대를 하고 돌아온 집에는 눈먼 아버지와 그를 보살피며 혼자서 장사를 하고 가정을 꾸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가 있었다. 눈먼 아버지는 어머니와 손을 잡고 개펄로 나가 바지락을 캐고, 정치망 그물을 쳐두고 다시 걷어올리는 일로 소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쪽파 농사를 짓던 곳에 힘겹게 빚을 얻어 식당 겸 민박집을 지었지만 여러 가지 손보고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연용씨는 미술가의 꿈을 접고 부모님 곁에 머물러야겠다고 결심했다. 학교에 복학하지 않았고, 군 복무기간 동안 아무말없이 기다려준 착한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모든 걸 정리하고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좀 과도한 결벽증이 가장 큰 이유였고, 또 제대하면 같이 유학을 가자는 꿈에 젖어 있던 여자친구를 더 이상 설득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천에서 한 시간이나 배를 타야 닿을 수 있었던 낙도에서 연용씨를 가장 심하게 괴롭힌 것은 세상과 격리된다는 느낌이었다. 신문도 배달되지 않는 곳에서, 주위에 친구도 없고 학교도 포기한 젊은이에게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막막함은 큰 고통이었다.

그때부터 인터넷을 시작했다. 낙도 주민에게 지원되는 고속인터넷(ADSL)용 안테나를 섬에서 가장 먼저 설치했다.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불완전한 인터넷 선을 통해 그는 세상과 연락하면서 ‘눈먼 어부 아버지’의 얘기를 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다. 연용씨에게 인터넷은 세상과, 그리고 그동안 단절돼 있던 아버지의 내면과 소통하는 수단이었다. 이듬해에는 선재대교가 개통돼 섬은 뭍으로 이어졌고, 인터넷 전용선도 들어와 연용씨의 작업은 더 활기를 띠었다.

정치망에 걸려든 고기가 많으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고기 한 마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여름엔 그물에 형편없이 엉겨붙는 해파리 떼와 겨울엔 한 번만 스쳐 지나도 그물을 망쳐놓는 성에와 싸우고, 밤새 그물을 손질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모두 연용씨의 카메라에 담겼다. 어떤 때는 바다로 이어진 줄을 갈고리로 더듬으며 어장으로 향하다 줄이 끊어져 방향을 잃고 헤매던 아버지, 그리고 혈당이 급격히 낮아져 쓰러진 채 물고기를 씹고 있던 아버지를 개펄에서 찾아내 눈물을 흘리며 업고 들어온 적도 있다.

한번도 배우지 않았던 사진을 독학으로 연구하면서 찍어내려간 것이 수만 장 쌓이면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그리고 어쩌면 평생 동안 모르고 지낼 뻔했던 아버지의 참모습을 조금씩 느끼게 됐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대장장이 일로 생계를 꾸리다 군대를 가게 되자 남은 가족들이 굶을까봐 눈물을 흘렸던 아버지, 제대하자마자 바다에 나가 바지락을 긁어 인천에 내다팔아 쌀 몇 됫박이라도 구해와야 했던 아버지의 예전 모습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안아 보기도 했고, 젊은 시절 연애담까지 격의없이 나누는 친구 같은 부자(父子)가 됐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왜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토록 의지하는지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섬 생활이 자리가 잡힌 후 아버지께 “낮에는 바닷일을 하고 밤에 야간 대학이라도 다니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이내 “내가 바닷일을 그만둬야 겠구나”라고 말해 옴짝달싹할 수가 없게 돼 서운했던 마음도 그래서 풀어졌다.

공부를 더하겠다는 꿈은 이제 접었다. 해외 촬영 여행을 지원해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와도 역시 아쉬움을 접는다. 아버지는 자신이 곁에서 잠시라도 떠나는 것을 몹시 서운해 하기 때문이다.

‘만져볼 수 있는 그림’ 설치미술 공부

그는 집 뒤켠에 작업실을 짓고 사진작업을 하는 한편으로 손으로 만져서도 알 수 있는 설치미술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다. 아버지를 모셔다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품평회를 열 날을 기다리면서….

지금 연용씨의 고민은 아직도 심한 당뇨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요즘도 매일 혈당을 체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만 걱정을 접을 수 없다. ‘병원에 가면 이제 다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병원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장님이 차를 타고 멀리 다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을 아는 연용씨가 왕진 전문 병원을 부르겠다고 해도 역시 막무가내다. 몸 불편한 아버지를 어장으로 내몰고 병 구완도 않는다는 ‘속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가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결론을 내렸다.

‘눈먼 어부’ 아버지의 삶을 사진으로, 글로 기록한 책 ‘아버지의 바다’에 연용씨는 이렇게 썼다.

‘간혹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 고생 좀 그만 시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난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그냥 지켜볼 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연용씨 부자의 사는 모습은 그들의  홈페이지 바다향기(
http://www.papabada.com/index1.html)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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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