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년 전북 고창 귀촌 - (전) 금호그룹 이사 - (현) 학원농장 대표 - (현) 한국관광농원협회장
자기다운 진정한 삶을 갈망하다
1971년 서울대 농업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농장으로 들어왔으나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젊은 청년은 생계비도 얻을 수 없는 땅에서 처절한 실패를 맛본다. 정부도 농민의 삶을 외면하던 70년대 초의 일이었다.
1년 반 즈음 땅을 일구다 청년은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25살의 청년은 신생기업이었던 당시 금호실업(현 금호그룹)에 입사하게 되고 발로 뛰는 성실함 신뢰를 주는 태도로 청년 진영호는 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시간이 흘러 이사로 조직 내 정점의 위치에 오르자 회사원로서의 야망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장 자기다운 진정한 삶을 추구하고 싶다는 또 다른 야망도 고개를 들었다. 1992년 5월 경. 주변의 만류와 격려와 함께 그는 퇴직한 다음 날 농장으로 내려왔다.
아내에게 두번째 프러포즈
농장에 오자마자 진영호 대표는 화훼농장을 계획하고 5천 평 규모의 하우스를 짓기 시작, 카네이션으로 농사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농업 기술이나 노하우가 없기도 했거니와 화훼업 자체가 초기 자본이 필요한 일이라 소규모 농민보다 자본력이 있어 유리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떨어져 살다가 결혼 20주년을 자축하고 남은여생을 농장에서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담은 플래카드를 농원에 걸고 진 대표는 두 팔을 벌려 꽃밭에서 아내를 맞았다. 생의 두 번째 프러포즈였던 셈이다. 부인 나란희 씨는 남편이 성심껏 가꾸고 있는 농원을 함께 멋지게 만들자고 결심했다. 자신의 남은 인생도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남편을 따라 고창에서 두 번째 삶의 터전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맛과 멋의 귀농생활
아내는 처음엔 마을 분들이 모두 고령이라 친구처럼 지낼 사람이 적어 외로웠다. 남편이 3년간 이란 생활을 하고 5년 동안 일본 출장 갔을 때 함께하며 느꼈던 외로움보다 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과 소박하게 관계 맺는 것에 도시에서 느껴보지 못한 맛과 멋을 느낀단다.
소비 생활과 생활 패턴도 전혀 달라졌다. 처음엔 도대체 살 게 없다고 느꼈던 5일장이 기다려 질 정도라고 한다.
애로사항이라면 농장에 딸린 민박 운영과 방문객 접객, 식당 운영을 담당하는데 있어서 노동력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힘든 점이 있다고 하소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