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잃어버린 것은 곧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건 버린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엄마와 딸은 어떤 관계이기에 이런 부탁을 하는 걸까?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건 아니다.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무한 대리인도 아니고, 마르지 않는 사랑의 화수분도 아니다.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다. 그런데 희생적인 엄마는 이기적인 딸을 낳는다는 거다. 딸들은 한 여자를 엄마로 만들어 파먹는다. 책장을 넘기며 불쌍한 엄마와 자독한 딸년에 대해 생각한다.
잊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물음은 '엄마는 어떻게 살았지?'하는 물음과 다를 바 없다. 놀라운 건 기억을 하나씩 벗겨가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자개 화장대처럼 오랜 세월 안방을 차지했지만 서서히 잊혀졌던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치매에 걸린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 그것도 하필이면 엄마 생일날 서울역에서.
엄마들은 여전히 현재에 살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생각나고 기억나는 존재로 전락한다. 어린아이 때는 얼굴을 가린 채 "엄마 없다."라고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지만, 자란 뒤에는 '엄마가 없는' 상황이 현실로 닥치리라는 걸 짐작한다. 버리려고 골목길 앞에 내놓은 화장대에 얼굴을 비춰본 적이 있다. 그순간 내 얼굴이 사라졌다. 더 이상 내가 알던, 매일 바라보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런 것처럼 엄마도 서서히 사라졌다. 아무리 기억을 굴려도 앙금처럼 남아 있는 날들은 그리많지 않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빨아주는 옷을 입고 몽당 빗자루로 맞아가며 살았다. 그런데도 그렇다.
자궁 속에선 엄마와 같이 호흡을 했건만, 어떻게 먼 별에 사는 것처럼 안부만 전하게 됐을까? 딸은 엄마에 대해 훤히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내 엄마를 설명해줄 말은 '엄마'가 전부다. "엄마"하고 처음 말을 배웠을 때 터져 나온 것 같은 감탄, 그러나 어느덧 탄식.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모성의 위대함? 아니 모성의 지독한 미련함 엄마는 엄마이기 때문에 미련하다. 지독하게 죽도록 미련하다. "이렇게 고단한 얼굴로 잠을 자면 얼굴에 주름진다...네얼굴에 이렇게 주름질 정도로 내가 살았으면 내 명도 짧은 명이라고 할 수 없재. 얘야 머리를 들어보렴. 너를 안고 싶어. 나는 이제 갈란다. 잠시 내 무릎을 베고 누워라." 이 엄마의 눈물 앞에서 딸의 눈물 콧물은 너무 싱겁다. 엄마가 된 딸들은 엄마처럼 인간을 마르지않게 하는 샘, 진짜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모성은 본능적으로 습득된 그 이상의 것이다. 모성은 외간 남자 앞에서 앞섶을 풀고, 엄마를 잃어버린 그 남자의 아이에게도 젖을 물릴 수 있다. 소설에서처럼 설령 내 아이 입으로 들아갈 양식을 훔친 인간의 아이라 할지라도. 어미라는 존재, 모든 모성은 독기를 품는다. 그렇지않고는 평생을 그렇게 무모하게 살 수 없다. 엄마와 딸이라는 운명. 이 운명적 만남은 엄마의 희생을 전제로 한 만남이다. 딸은 배 속에서 엄마의 뼜속에 있는 진을, 노역으로 얻은 결실을 파먹지 않았는가. 엄마는 놓여나고 싶지만 딸은 악착같이 쥐고 놓아주지않는다.
엄마도 생리를 하는 여자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않고 머리에 아무것도 이지않고 등에 아무것도 업지않고 그렇게 홀로 되어 걸어본 지가 언제 적인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저녁 새도 보고 어릴적에 어머니랑 함께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타박타박 길을 가는 저녁, 그런 저녁이 엄마들의 일생에서 며칠이나 될까. 엄마 또한 순간순간 미련한 모성을 내려놓고 새처럼 훨훨 자유롭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신고 있는 굽이 다 닳아버린 파란 슬리퍼를 벗고 싶어. 내가 입고 있는 먼지투성이 여름옷도, 이제는 나도 이게 나인지 알아볼 수 없는 이 몰골에서 벗어나고 싶어. ...나는 몇 해 전에 세워놓은 선산의 가묘로는 안 갈라요. 오십 년도 넘게 이 집에서 살았응게 인자는 날 쫌 놔주시오." 그러나 나는 엄마가 지쳐갔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엄마는 언제나 내 엄마로 살아가니까 죽는 그 순간까지 내 엄마라는 사실은 변함 없으니까. 엄마도 명자나무에 붉은 꽃등을 켜고 서 있을 때 흉한 꿈을 꾸엇을 것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달거리를 했고, 생식과 수유를 생의 기쁨으로 받아들인 여자다. 마음으로 남자를 품었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이 내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게 틀림없소이. 당신에게 그토록 내 마음대로 해버린 걸 보면 말이요이.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당신을 찾아가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손을 잡지 못하게 해 미안했소.나는 당신에게 그렇게 다가갔으면서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것 같으면 몰인정하게 굴었네....당신은 내게 죄였고 내게 행복이었네."
문득 엄마가 생리를 한 여자라는 것, 그것이 엄마의 가장 큰 비밀을 안것처럼 느껴진다.
엄마를 잃어버리면 생은 얼마나 메마를 것인가? 엄마를 가까이 느낄 때는 엄마가 퍼줄 때다. '다 파먹힌 몸으로 잠이 오지않는 밤이면 마늘을 까고 그 마늘로 김치를 담가 부치고' 철철이 먹을 것을 보낼 때 엄마를 느낀다. 딸들에게 내재된 굶주림은 설명할 길이 없다. 도둑게 같은 딸년, 기꺼이 살을 파먹히고 소라 껍질이 되어주는 엄마.
헌신적인 엄마일수록 이기적인 딸을 평생 건사한다. 김치며 청국장, 참기름, 짭조름한 오이지를 철철이 보내는 엄마. 엄마의 보따리를 사랑의 총량으로 여기는 딸들은 엄마의 살냄새와 김치 냄새를 기꺼이 바꾼다.
엄마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은 보지도 않았는데 딸들은 엄마의 용도를 잘도 안다. 청국장, 김치같이 짜고 질기고 묵은 음식이고 싶을 때, 설움이 치받을 때, 나이 먹어가는 쓸쓸함을 느낄 때, 어느날 문득 산다는 것이 막막할 때 엄마를 생각한다. 내리사랑이라고 포장한 그 포장을 풀고 보면 김치 국물 묻은 보자기처럼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얼룩이 느러난다.
나도 어디에다 엄마를 두고 왔다. 어린 시절 초라한 옷을 입은 엄마가 학교에 도시락을 들고 나타났을 때, 푸석하고 피곤한 얼굴의 엄마가 끙끙 앓아 누웠을 때. 엄마는 늘 옛집 어딘가에 있다. 엄마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엄마를 버렸다는 사실만큼 절망스러운 것도 없다. 엄마가 목어도 아닌데 밤새워 두드린 적 없는가. 아무 말도 못한채 "엄마, 엄마" 하고 가슴을 치며 운 적 없는가. 엄마를 일어버린 인생은 앞으로 얼마나 메마르고 고단할 것인가.
나는 자꾸만 소설의 행간에서 벗어나서 다르게 읽는다. 서울역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사실은 기억에서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엄마가 옛집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한다.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니 '엄마를 잃어버린 나를 부탁해.'라고 그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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