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프리즘> |
향남원에서의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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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 화가, 서울대 교수
지난달 말의 주말 오후를 남쪽의 향남원(鄕南院)에서 보냈다. 향남원은 순천에 있는 한 고택의 당호인데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한 곳에 모두 여섯 채의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보 이는 한옥들의 품새는 한눈에 명문세가의 위용을 가늠케 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마당 한쪽에 서 있는 100년이 넘었다는 홍매 한 그루. 당장이라도 지필묵 펼쳐 그림에 담고 싶은 정경이다.
향남원터는 원래 순천대 임상규 총장 세거지다. 그는 연어가 회귀하듯 60여년 만에 자신이 출생했던, 계산 무량(溪山無量)의 현판 걸린 본채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 세거지를 지극정성으로 가꾸어 증축하거나 새로 지어가며 문화재단으로 내놓았다. 이름하여 향남문화재단. 이 재단은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 학금을 조성해 지역 인재를 양성하고 학자들의 세미나를 개최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문화축제를 열었다. 적막하던 고을이 향남원으로 인하여 아연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내가 간 날도 지역 원로들을 비롯, 130여명의 인사가 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도성 판소리팀이 초청돼 가야금 병창과 춤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 잔치에 누구는 흑돼지를 내고 누구는 흑산도 홍어를 출연했다는 둥 사회자가 소개하고 있는 새 마당에서는 아낙들이 분주히 움직여 전을 지지고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기와집 뒤편으로는 대숲이 청량한 바람에 일렁이는데 모처럼 가·무·악(歌舞樂)이 어우러진 한마당 잔치가 푸짐 하게 펼쳐진 것이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이런 잔치에 참여하기는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판소리의 고장답게 ‘춘향가’가 울려 퍼지면 얼쑤! 좋다 하는 청중의 추임새가 자연스레 뒤따랐고 흥에 겨워 무대로 나온 나이 지긋한 청중 한 분은 놀랍게도 ‘적벽가’를 멋들어지게 뽑았는데 그 수준이 보통이 아니 었다. 비로소 풍류와 예악, 가무의 본고장에 와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주인인 임 총장은 일일이 둘러보며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지 챙기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끔 그이를 볼 때면 워낙 과묵한 데다 장·차관을 비롯, 지내온 이력이 하도 유명하여 접근이 쉽지 않았는데 고향집에서의 그는 인심 좋고 수더분한 시골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이는 1년에 한두 차례씩 크고 작은 잔치를 열어 지역 인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처럼 그는 고향에 돌아와 교육과 문화의 전파에 푹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귀찮지 않으세요”하고 물었더니 “귀찮기는, 즐겁지”하고 그는 평소에 그 짧고 명료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우리의 전통이 쇠락해 가는 것이 늘 안타까웠소. 내 고향집을 가꾸어 문화재단으로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소.”
고향집에 깃든 유년의 추억과 정이 그리워서이기도 했지만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향남원을 가꾸고 돌봐 왔다는 것이다. 교자상에 차려진 이른 저녁을 먹고 보료 깔린 한실에서 잠을 청하자니 차마 잠들기가 아까웠다. 섬돌의 흰 고무신을 신고 적막한 마당에 나오니 달은 휘영청 떠 있는데 우우 지나가는 솔바람 소리며 대바람 소리가 귓가에 가득 담겨 온다. 나뭇잎이 서걱대는 소리며 멀리서 컹컹 개 짖는 소리도 들려 왔다. 성큼 내 유년의 공간 속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문득 우리 집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선반에 먼지 를 뒤집어쓰고 있는 어려운 보첩을 들춰 보이는 것보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는 것이 그들에겐 소중한 체험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고향 상실을 앓고 있는 정신적 실향민들이다. 전국 여기저기에 또 다른 향남원 같은 고향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절로 들었다. 개인이 어렵다면 지자체에서라도 이런 유서 깊은 터를 매입하여 마을 공동체와 문화사랑방으로 세울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집주인 내외의 전송을 받으며 동네를 나와 순천만 갈대밭을 돌아보고 나니 해가 설핏하다. 귀경하는 차에 오르기 전, 눈으로 향남원 쪽을 다시 가늠하며 백설애애(白雪靄靄)한 날을 골라 그곳에 다시와 군불 땐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리라 기약해 보았다.
지난달 말의 주말 오후를 남쪽의 향남원(鄕南院)에서 보냈다. 향남원은 순천에 있는 한 고택의 당호인데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아늑한 곳에 모두 여섯 채의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보 이는 한옥들의 품새는 한눈에 명문세가의 위용을 가늠케 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마당 한쪽에 서 있는 100년이 넘었다는 홍매 한 그루. 당장이라도 지필묵 펼쳐 그림에 담고 싶은 정경이다.
향남원터는 원래 순천대 임상규 총장 세거지다. 그는 연어가 회귀하듯 60여년 만에 자신이 출생했던, 계산 무량(溪山無量)의 현판 걸린 본채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는 이 세거지를 지극정성으로 가꾸어 증축하거나 새로 지어가며 문화재단으로 내놓았다. 이름하여 향남문화재단. 이 재단은 발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 학금을 조성해 지역 인재를 양성하고 학자들의 세미나를 개최하는가 하면 이런저런 문화축제를 열었다. 적막하던 고을이 향남원으로 인하여 아연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내가 간 날도 지역 원로들을 비롯, 130여명의 인사가 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도성 판소리팀이 초청돼 가야금 병창과 춤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 잔치에 누구는 흑돼지를 내고 누구는 흑산도 홍어를 출연했다는 둥 사회자가 소개하고 있는 새 마당에서는 아낙들이 분주히 움직여 전을 지지고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기와집 뒤편으로는 대숲이 청량한 바람에 일렁이는데 모처럼 가·무·악(歌舞樂)이 어우러진 한마당 잔치가 푸짐 하게 펼쳐진 것이다.
이제는 영화 속에서나 봄직한 이런 잔치에 참여하기는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판소리의 고장답게 ‘춘향가’가 울려 퍼지면 얼쑤! 좋다 하는 청중의 추임새가 자연스레 뒤따랐고 흥에 겨워 무대로 나온 나이 지긋한 청중 한 분은 놀랍게도 ‘적벽가’를 멋들어지게 뽑았는데 그 수준이 보통이 아니 었다. 비로소 풍류와 예악, 가무의 본고장에 와 있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주인인 임 총장은 일일이 둘러보며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지 챙기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끔 그이를 볼 때면 워낙 과묵한 데다 장·차관을 비롯, 지내온 이력이 하도 유명하여 접근이 쉽지 않았는데 고향집에서의 그는 인심 좋고 수더분한 시골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이는 1년에 한두 차례씩 크고 작은 잔치를 열어 지역 인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처럼 그는 고향에 돌아와 교육과 문화의 전파에 푹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귀찮지 않으세요”하고 물었더니 “귀찮기는, 즐겁지”하고 그는 평소에 그 짧고 명료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우리의 전통이 쇠락해 가는 것이 늘 안타까웠소. 내 고향집을 가꾸어 문화재단으로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소.”
고향집에 깃든 유년의 추억과 정이 그리워서이기도 했지만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향남원을 가꾸고 돌봐 왔다는 것이다. 교자상에 차려진 이른 저녁을 먹고 보료 깔린 한실에서 잠을 청하자니 차마 잠들기가 아까웠다. 섬돌의 흰 고무신을 신고 적막한 마당에 나오니 달은 휘영청 떠 있는데 우우 지나가는 솔바람 소리며 대바람 소리가 귓가에 가득 담겨 온다. 나뭇잎이 서걱대는 소리며 멀리서 컹컹 개 짖는 소리도 들려 왔다. 성큼 내 유년의 공간 속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문득 우리 집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선반에 먼지 를 뒤집어쓰고 있는 어려운 보첩을 들춰 보이는 것보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내는 것이 그들에겐 소중한 체험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고향 상실을 앓고 있는 정신적 실향민들이다. 전국 여기저기에 또 다른 향남원 같은 고향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절로 들었다. 개인이 어렵다면 지자체에서라도 이런 유서 깊은 터를 매입하여 마을 공동체와 문화사랑방으로 세울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집주인 내외의 전송을 받으며 동네를 나와 순천만 갈대밭을 돌아보고 나니 해가 설핏하다. 귀경하는 차에 오르기 전, 눈으로 향남원 쪽을 다시 가늠하며 백설애애(白雪靄靄)한 날을 골라 그곳에 다시와 군불 땐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리라 기약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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