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이야기

울릉도 종조 탄생 120주년 2022회당문화축제 !!

정진공 2021. 8. 23. 14:56
1. 서 론




손규상 (孫珪祥, 1902~1963)
개항 이후 근대에 접어든 불교계가 시급하게 갖추어야 할 것이 개혁적 사고였다. 그것은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인한 정체성의 부재가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세기 초 한국불교계는 혁신적 변화를 추구한 개혁론들이 발표되었다. 많은 변화가 논의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서 주체적 활동이 통제되었던 까닭에 많은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일제강점기를 보낸 불교계는 8·15광복 후 들어온 미 군정의 기독교적 편향정책으로 다시 사회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의 통제에 의해 세가 약해진 불교는 기독교의 급진적 선교정책에 밀려 사회적 역할이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 과거의 불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주장한 분이 회당(悔堂) 손규상(孫珪祥, 1902~1963)이다. 근현대 격변기를 보낸 그는 불교와 인연을 맺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깊게 인식하였고,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불교를 정립하였다. 왜냐하면 불교가 오랜 시간 동안 우리 국민의 심성을 이끌어 오면서 국민 정신세계 통일과 고유한 문화의 형성 그리고 정치적 통일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주체의식이 불법(佛法)에 있고, 그것은 시대와 사회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사회변화에 따른 불교 변화를 절실하게 바랐다.
회당은 개혁적 변화를 주장하면서 기존 질서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바탕으로 새로운 감각의 사고를 창출해 냄으로써 이원적 가치체계의 변모를 꾀하였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일원주의에서 벗어나 한국사회는 물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향이었다.
회당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몇 편의 글로 남겼다. 대부분 1950년대에 집필되어 청장년 시대를 겪으며 보았던 한국불교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소견이 들어 있다. 따라서 그런 개혁사상을 살펴보는 것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시기 한국불교 변화의 방향을 살펴보는 일이며, 현대불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초석이라 할 수 있다.

2. 회당의 생애와 근대의식
회당 손규상은 1902년 5월 10일 경북 울릉도에서 태어나 1963년 10월 16일 대구시 북구 침산동 불승심인당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생애는 대략적으로 한국사에서 외압과 내란이라는 격동의 시대와 일치한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은 이 속에서 성장하고 활동한 회당의 시대인식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시사한다.
회당의 유년 시절은 사회적으로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민족의 현실이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무단통치의 극한적 상황에 빠지게 되었고, 식민지 체제의 종속적 현실이 가중되었다. 일제는 1911년 6월 총독부 제령 7호로 사찰령을 반포한 이후 7월 8일 총독부는 전문 8조로 된 사찰령 시행규칙을 제정하여 그해 9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한국불교를 30본산으로 구분한 일제는 본산 주지를 총독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하도록 하였다.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된 한국불교는 30본산 체제로 변경되었다. 많은 권한이 주지에게 일임되자 그 자리를 고수하거나 종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본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출가제도, 법계 그리고 의례가 일제의 의도대로 변하였다. 그리고 본사 주지를 공선(公選)으로 선출하면서 본말사의 관계는 관료적으로 변하였다. 계율에서 벗어나 속화된 모습이 나타났다. 그 후 일제가 사찰령을 개정하여 대처식육이 용인되자 한국 불교의 지계(持戒) 정신은 급속도로 변질되었다. 1930년대부터 일제는 전시 체제에 맞게 한국불교를 총본산제로 개편하고 친일을 강요하였다. 그런 배경에서 생겨난 총본산은 경제적 후원과 함께 일제의 불교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기를 보낸 회당이었지만 일제의 강점에 굴하지 않고 자의식을 형성시켜 나갔다. 1916년 15세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보통학교 입학, 1922년 2월 대구 계성학교 입학과 동경 유학, 그리고 1924년에 시작된 사회 활동 등 어려운 현실에 도전하여 자신의 의식을 키워갔다. 그런 의식의 전환은 실제 우리 현실을 체험하고 싶은 생각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우리의 현실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여 끊임없는 유민(流民)을 양산하자 조국의 현실을 체험하고자 두 번에 걸친 국토순례를 단행하였다.
첫 번째 순례는 울릉도에서 어렵게 진학한 계성학교가 휴교하자 그 틈을 이용해서 친구와 함께 2개월에 걸쳐 시도하였다. 조국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때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와 조국이 일제의 강점에 들어간 것은 역시 힘이 없어 생겨난 사실임을 통렬히 느꼈다. 이런 체험은 후일 회당이 국가가 외세의 힘에서 벗어나고자 하려면 정치적으로 자주력이 있어야 하며, 뒷날 종교적으로 진호국가불사(鎭護國家佛事)로 귀착될 수 있었다.
두 번째 국토 순례는 1940년에 시도하였다. 젊은 혈기로 본 첫 번째 순례와 달리 장년의 원숙함이 배어 있는 순례였다. 이때 불교의 실태는 물론이고 민생들이 겪는 고초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회당의 청년 시절은 그의 사상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이 시기에 불법과의 인연은 물론이고 조국 현실의 이해 그리고 회당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이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살펴볼 때 회당의 청년 시기는 정치적으로 일제의 강점과 민초들의 현실적 괴로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의 속성을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의 축적을 인식한 시기이다. 일제를 알기 위해 계성학교가 휴교하자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일본행을 감행한 것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비록 일본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분명 강대국의 현실은 약소국보다 무엇이 앞서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뒤에 불법에 의거 다양한 사회 활동은 물론 교육적 가치가 높이 드러나는 사상 형성의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회당에 있어 장년과 노년의 시기는 1945년 8·15해방에서부터 입적한 1963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회당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사회에 실현되었던 기간이다. 이때 한국사회는 미 군정의 지배, 좌·우의 갈등, 6·25 그리고 정치적 갈등 등 혼돈과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는 개인의 일생으로 보아도 험난한 시간이며, 민중 전체로 보더라도 역경의 시대였다.
회당은 8·15광복 후 불교계의 자정 노력을 지켜보았다. 전쟁 후 불교계에서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것이 정화였다. 회당 역시 이런 정화에 대해서는 긍정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청년 시절부터 겪었던 일제의 한국불교 왜곡에 대한 정립과 일맥상통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화가 단순히 비구·대처 간의 사찰 소유가 아니고 일제하에서 불교가 부패한 것은 민족성의 부패였기 때문에 불교의 정화는 곧 민족혼의 정화로 생각한 것이다.
회당은 찬란한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 불교가 일제에 의해 그 전통이 변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폐단은 신성한 사찰 경내가 방가취무의 유희장이 되어 부패로 이어졌다. 수행자들은 이것을 깊이 탄식하고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을 살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바로잡지 못해 승려들은 사십 년 동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그는 정화라는 문구 자체가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처럼 일제에 의해 탁해진 모든 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나라의 불교를 조금이라도 인식하는 국민들이라면 불교 정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생각한 정화는 단순한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에 형성되었던 모순을 척결하고 현대사회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다양한 견해와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불교였다. 그렇게 되려면 한국불교는 반드시 정체성을 회복한 후 여러 종파가 형성되어 자유 시대 자유로운 생각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이 복잡한 오늘날 정신이 병들어 부부, 부자, 형제, 민족 간에 투쟁하고 분열하는 사상병을 교화할 수 있도록 여러 종파로 분열되는 것은 시대적 요구임을 인식한 것이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불교 역시 고대부터 전승된 것 하나로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현대사회가 다양한 종교의 시대가 되며, 치열한 경쟁이 도래할 것으로 예견하였다. 실제 그의 생각대로 광복 후 제정된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모든 종교 활동이 자유롭게 되자 자연히 나라 안에는 종교의 주존, 곧 사상의 주인공이 많아졌다. 그는 이처럼 국교를 정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금지하지 않는 종교 자유 시대에서 불교인의 자세에 대해 역설하였다. 먼저 불교도가 불교를 신앙하는 데 있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전제시대는 나라에서 국교를 세우고 이단을 금지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그럴 수 없으므로 불교도들이 이단과 외도를 멀리해야 다양한 종교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면으로 볼 때 회당의 장년과 노년은 현실적 상황을 깊이 통찰하고 그 대안으로써 정신적 해결을 위한 노력으로 도덕이 강조된 종교적 사회변혁을 시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손규상|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