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학 |
2012년 5월 17일 오전 10:15 |
[기고] 스님들의 도박 어떻게 볼 것인가 - 정웅기 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운영위원장
스님들이 밤샘 도박을 했다는 뉴스로 온 나라가 며칠 들썩였다. 인터넷에 유포된 동영상에는 술과 담배를 하며 포커를 치는 스님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겼고, 이 모습은 불자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다행히 당사자들이 공직에서 사퇴하고, 총무원에서도 참회와 대책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이 충격은 한동안 불교계 전체에 가시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스님들의 도박이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2000년대 이후에만 스님들의 도박 문제가 사회이슈가 되었던 적이 이번으로 세 번째다. 그때마다 관련자들이 사퇴하고 나름의 대책을 마련한다 했지만, 이번에 또 다시 재현되었으니 이제는 좀 더 근본적이고 철저한 대책마련이 절실하다.
이번 도박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대로 수억대의 판돈을 건 전문도박인지, 아니면 당사자들의 항변대로 도반들끼리의 놀이 정도의 수준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정확한 진상은 종단이나 검찰에서 조사를 하니 곧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설혹 수억대의 전문도박이 아니고, 놀이 삼아 한 것이라 할지라도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도박에 빠지는 사람에게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고 하셨다. 첫째 이기더라도 미움을 사게 되고, 둘째 지게 되면 재산을 잃어 슬픔에 빠지며, 셋째 이기더라도 재산이 줄어들며, 넷째 법정에서는 그 말의 무게가 없어지게 되며, 다섯째 친구나 관청으로부터 업심여김을 당하고, 여섯째 혼담에 지장이 있게 되느니라.(<장아함경> 제 11:선생경) 재가불자에게도 도박을 금하셨던 부처님이시니 출가수행자의 도박이야 큰 허물이 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계 사정을 좀 아는 사람들에게 스님들의 도박문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지 않은 스님들이 화투나 도박을 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도반들끼리 모여 놀이삼아 포커나 화투놀이를 하는 정도이겠지만, 게중에는 큰 돈을 건 내기도박을 하는 이도 극소수 있는 것으로 안다.
놀이 수준의 포커나 화투는 성인 남성들에게는 흔한 놀이문화다. 특히 상가집에 가서 도박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용인된다. 문중 어른의 49재일에 도반들이 모여서 도박을 하면서,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면 이런 정도의 인식수준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불자들보다도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출가한 스님들이 포커를 한다는 것, 더구나 술담배를 버젓이 피우며 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크게 분개했다.
시민들은 출가한 스님들에게(종교인들 일반이라 봐도 좋을것이다) 훨씬 높은 윤리적 수준을 바랬다. 당사자들이야 한 편으로 억울한 마음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민들의 기대는 종교인들이 누리는 사회적 대접에 걸맞는 윤리적 책임을 지라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출가한 스님들에게 더한 윤리적 행위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사람들이 불교에 보내는 애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 도박사건이 불교공동체 전체의 허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출재가 불자들이 스스로의 허물을 드러내어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인식때문일 것이다. 그 분들의 마음에 깊은 연대와 환영의 뜻을 표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도박사태와 관련한 공동체의 허물들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도박 당사자들의 허물 -. 도박이라는 향락적 놀이문화에 탐닉한 허물 -. 언론사의 취재에 거짓을 말한 허물 -. 법을 나누어야 할 도반들에게 욕망과 쾌락을 권하고 서로 행하게 한 허물 -. 중생의 시은을 가벼이 여긴 허물 -. 자신의 행위가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랐던 무지의 허물 -. 선한 수행자들에게 불명예를 안긴 허물 -. 공동체의 출재가 불자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허물 -. 고통받는 시민들의 삶에 위안을 주지 못하고, 분노와 허탈감을 안겨주어, 시민들이 불교계에 기대했던 바를 무너뜨린 허물
○ 고발자들의 허물 -. 세속에서도 지탄받는 비윤리적 방법을 사용한 허물 -. 내부에서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를 밖으로 알려 공동체에 큰 해를 끼친 허물 -. 자신의 욕망과 분노를 앞세워 공동체를 부정하고 비방한 허물
○ 백양사 대중들의 허물 -. 도반들의 잘못을 따끔하게 경책하고 막지 못한 허물 -. 공동체의 불신과 다툼을 방치하고 해결 못한 허물
○ 중앙종무기관의 허물 -. 청정한 언행으로 대중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한 허물 -. 향락문화의 실상을 알았으면서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지 않은 허물 -. 백양사 대중들의 다툼을 알았으면서도 적극 중재하고 해결하지 못한 허물 -. 주지 임기 보장이라는 절차에 매어 대중의 공의를 우선하지 않은 허물
○ 원로 중진들의 허물 -. 선교율의 중진 원로들이 삶으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허물 -. 중진 원로들이 그릇된 향락문화를 직시하고 준엄히 꾸짖지 못한 허물 -. 수행자들에게 숲과 같은 이 공동체를 잘 이끌지 못한 허물
○ 재가불자들의 허물 -. 스님들의 부적절한 향락문화를 묵인하고 도운 허물 -. 앎과 행이 일치하지 않은 스님들을 견책하고 비판하지 않은 허물
○ 공동체 전체의 허물 -. 구성원들의 삶이 붓다에게서 멀어지도록 방치한 허물 -. 죄를 지은 당사자들의 허물을 공동체 전체의 허물로 인식하지 못한 허물 -.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승가를 욕보인 허물 -. 문제를 드러내어 해결하지 못하고 뒤에서 험담하거나 곪도록 내버려둔 허물 -. 근대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지 못해 공화주의 전통을 약화시켜 공동체가 크게 약화되도록 방치한 허물
왜 대중들은 종단의 대응에 흔쾌하지 않은 것일까
사건 이후 조계종 총무원의 집행부들이 총 사퇴하고, 종정, 총무원장을 비롯한 지도부들이 대책 마련에 나선 것은 당연하고도 다행스런 일이다. 차제에 도박 등 생활 전반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있는 향락문화가 있다면, 철저히 가려내어 없애가야 할 것이다. 공동체 전체가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함도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조계종의 적극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신뢰의 눈길을 보내지 않고 있다. 정치적 이익을 노린 일부 세력들의 험담이야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해도, 대개의 출재가 대중들이 종단의 대응에 흔쾌하게 동의하고,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조계종이라는 불교공동체가 맞고 있는 본질적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이제 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우선 이번 도박사건으로 드러난 ‘스님들의 생활 문화’에 대한 것부터 짚어보자. 사실 도박이 놀이문화로 거리낌 없이 통용되어 온 것은 스님들의 생활문화 전반의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한국의 출가수행자들의 생활은 붓다의 삶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부처님은 평생 밥을 빌어 드셨다. 화장터에서 얻은 걸레조각을 몸에 걸치고, 나무 밑에서 잠을 잤다. 영락없는 거지의 삶이었지만, 거지의 행색으로 얼마나 성스러운 삶이 가능한지를 보여주셨고, 그 삶은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거지의 행색을 한 성자의 삶’ 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델이었고, 불교가 인류사에 남긴 드라마틱한 공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출가수행자들의 삶은 어떠한가. 적지 않은 스님들의 의식주는 중산층 이상의 수준을 향유한다. 값비싼 음식을 즐기고, 절에서 밥을 먹을 때조차 푸짐하게 차려진 독상에서 밥을 먹는다. 수 백 만원이 넘는 고급 승복을 입으며, 혼자자기에는 턱없이 큰 방에서 홀로 잔다. 고급차․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스님도 많고, 해외여행에 골프를 즐기는 이도 적지 않다. 수백 수천만원짜리 보이차를 구하러 중국에 간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부처님처럼 걸인으로 살기는 커녕 이렇게 중류 이상의 호화생활을 하는 삶에서 대자비심이,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발심이 싹틀 수 있을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붓다의 삶에서 멀어진 이러한 일상의 삶은 기도와 의례 봉사와 같은 다른 활동, 나아가 자기 내면의 계발을 위한 수행에도 당연히 이어질 것이다. 삶이 수행자의 길에서 멀어진 이가 붓다처럼 수행하고 전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출가수행자들이 부처님과 똑같은 걸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변했고, 방법이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그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이런 이야기를 공동체 내에서 그동안 진척시켜오지 못한 것이야말로 진짜 문제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를 할라치면 어떤 분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또 열심히 소박하게 잘 사는 스님들도 많은데 왜 전체를 매도하느냐고. 내가 정말 말하고 싶은 부분도 바로 이 점이다. 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이 문제는 고쳐지지 않는 것인가? 왜 대부분이 잘 사는데 왜 이 공동체안에서는 잊을만 하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부끄러운 일들이 반복되는가?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돈과 권력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심지어 부처님 재세 시에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그런 사람들을 이 공동체가 어떻게 다루는가에 있다. 예부터 불교공동체를 불가(佛家)라 했다. 출가수행자들은 부처님이 만든 집안에 사는 한 식구들이다. 재가불자들까지 포함하면 대가족이다.
만약에 한 집안 식구 중에 엉망으로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안의 구성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쓸 것이다. 야단도 치고, 설득도 하고, 필요하면 매질도 마다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머지 식구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어도 개선되지 않으면, 안타깝지만 집안 밖으로 내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당사자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붓다가 풀었던 방식, 공동체와 공동체윤리의 강화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의 출가공동체 안에는 세속의 집안 식구들이 갖는 만큼의 상호책임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는 이제 허물어져 비가 새고 금이 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것을 자기 문제로 여기는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 그나마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제 집 살림에만 여념이 없다. 공동체가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니,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 한다는 개인주의, 그 밑에 깔린 두려움과 욕망이 저 세속의 여염집 살림과 무엇이 다른지 알기 어렵다.
숲은 공동체, 나무는 수행자이다. 나무 한그루한그루가 저마다 크기도 이름도 성질도 다르지만, 그것들이 모여 숲을 이루면, 그 숲은 나무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힘을 갖는다. 수행공동체인 '승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나무는 저마다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지만, 숲은 시간이 갈수록 심하게 망가지고 있다. 그렇게 숲이 망가지고도 나무들은 건재할 수 있을까? 이 공동체가 무너진다면, 불교가 쇠퇴한다면 개인들의 삶은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을까?
뒷방에서 숲을 걱정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는 많다. 저 권승들 몇몇만 좀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는 하소연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마음으로 돈과 권력에 쩔은 사람들이 저절로 퇴장할까?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부처님께서 데바닷다를 교단에서 쫓아내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 상태에서 몇몇 권승을 쫓아낸들 다시 그런 사람이 발붙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아마 십중팔구는 또 반복된다. 대중이 살아있지 않으면, 공동체가 복원되지 않으면 그러한 재발은 피할 길이 없다. 도박이나 흐트러진 생활문화와 같은 표면화된 사건이 위기가 아니라, 이 공동체 안의 대중들이 공동체를 외면하고 비법적 현실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위기인 것이다.
문제를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이 공동체의 운영구조가 낳은 측면도 크다. 당장 이 공동체 안에서 평범한 대중들은 종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개선과 관련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어떠한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 대의구조가 이것을 맡아야 하지만, 현실은 너무 거리가 멀다.
우리는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지고, 역사 속에서 유지되어 온 승가공동체를 다시 주목해야 한다. 불교공동체는 전통적으로 결계를 통해 공동체의 범주와 구성원들을 정하고, 전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포살을 통해 수행생활을 점검했다. 여기에 부정기적으로 열리는 갈마라는 공동체 회의를 통해 공화주의에 입각한 의사결정을 하였다. 부처님은 4인 이상의 대중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에만 포살을 하게 함으로써, 모든 승단의 구성원들은 공동체생활을 하게 했다. 4인, 5인, 10인, 20인, 20인 이상의 5개 층위의 공동체가 있었고, 20인 이상의 공동체에서만 모든 의사결정을 허용함으로써 공동체야말로 보물중의 보물이라고 하셨다.
공동체의 의사결정은 평화적인 토론, 만장일치를 지향했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시에는 다수로 정하고, 소수는 다수의 의사에 승복했다. 이러한 포살이나 갈마는 출가승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포살일에 재가자들은 절을 찾아 그날만은 팔재계를 지키며 출가수행자로 살았고, 특히 승물의 운영과 관련된 갈마에는 재가자들도 참여케 했다. 부처님께서 장례식 전체를 재가자들에게 맡겼던 것도 이런 내적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처님이 운영하셨던 공동체는 이렇게 아름다운, 사부대중을 향해 열린 공동체였다. 그랬기에 승가는 2천6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공화적 전통은 불교가 전근대의 미망에서 허덕일 때 조차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90년대만 해도 ‘중벼슬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말이 종종 통용되었는데, 이는 주지가 전횡을 일삼을 수 없었던 대중공의의 전통이 남아 있었던 것을 반증한다.
지난 94년 이후 조계종이 추진해 온 변화를 압축해서 정리한다면 대의제로 대표되는 근대민주주의의 구현이었다. 총무원장 권력 분산, 삼권분립, 중앙종회 및 교구본사 주지 역할 강화 등 대체로 근대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하는 조치들이 주종을 이뤘다. 교구본사 주지가 (제한적이지만) 대중들의 직선으로 선출되고, 각 교구에서 선출된 중앙종회의원이 지역대표로서 종단의 주된 의사결정을 한다. 마치 국회의원처럼. 그러다보니 계파라는 것도 생겨났고, 종단 정치라는 것도 생겨났다. 인사를 비롯한 주된 결정을 놓고 계파간에 경쟁을 한다. 이것은 근대민주주의를 종단에 이식한 당연스런 결과다. 길게 보면 개항이후 한국불교의 주류가 추구했던 근대화의 연장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종단의 대의제도는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심한 동맥경화상태로 접어든지 오래다.
현행 종단의 대의구조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사회보다 취약하다. 세간에서는 지자체장, 대통령, 국회의원, 교육감 등을 모두 직선으로 뽑지만, 종단에서는 간선과 제한적 직선으로 뽑는다. 그런데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직선으로 뽑아 놓은 대통령이 임기 기간 전횡을 휘두르는 폐해를 경험하면서,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할 직접민주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모색하고 있다. 한계에 봉착한 근대민주주의를 대중의 직접참여를 강화하여 극복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공화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불교공동체야말로 여기에 매우 이상적인 답을 제공할 수 있지만, 정작 우리 안의 공화적 전통은 정말 형편없이 망가졌다. 그것이 과연 불교의 전통이었는지를 떠올리는 사람조차 거의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어떤 공동체든지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대신 어떤 사소한 문제라도 그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다루어질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뒷담화는 많지만 앞에서는 아무도 책임있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묘한 침묵. 안타깝지만 지금 종단의 상태가 그렇다.
나는 도박사건의 문제나 해결책들은 공동체에서 찾고 공동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부실과 쇠퇴에서 원인을 찾고 현대적 공동체윤리의 복원으로 답을 찾지 않으면, 그 본질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도박처럼 세간법으로 고소 할 수 없는, 호화향락 생활의 문제야말로 도박사건의 배경인데, 이런 바탕이 되는 문제를 공동체윤리로 풀지 않으면 다른 해결책은 아예 내올 수 없다. 이러한 생활문화의 개선뿐만 아니라 돈의 투명한 사용과 공개, 나아가 살림살이를 대중공의로 결정하고, 상당부분을 재가불자에게 맡기는 것, 사부대중 공동체로 사찰을 개선해 나가는 것과 같은 개혁과제 역시 공동체의 틀 안에서 다뤄지고, 수준에 맞게 개선해 가지 않고서는 실행되기 난망하다. 비록 현실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더라도 자꾸 다루고, 노력해야 공동체는 서서히 살아난다.
이번 사태의 과정에서 한 두 사람의 발고로 종단이 뿌리채 흔들리는 상황을 보며, 나는 도박의 문제는 몇몇 당사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이 문제를 다루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근대민주주의가 불교공동체의 공화적 전통을 대신할 수 없다는 한계도 거듭 확인한다. 불교공동체가 살아나려면 공의제(공화주의)의 전통을 현대사회에 맞게 어떻게 구현해 갈 것인지를 근본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가야 할 방향을 이렇게 분명히 잡아가야 한다.
한 가지 물음이 남는다. 이러한 근본적 모색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일부 종단 밖의 인사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총무원장의 사퇴를 주장하며, 비상대책기구를 발족시키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명분은 정화인데, 94년이나 98년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하다. 다시 한 번 혁명을 하자는 이야기인데, 지난 십수년간 파편화된 이 공동체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소리를 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설혹 소수의 폭력으로 종권을 뒤집어 엎은들 대체 스스로의 삶도 떳떳하지 못한 이가, 어떻게 무엇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도박사건은 분명히 한국불교공동체에 정화의 수준에 해당하는 질적 쇄신 작업을 요청하고 있다. 그 큰 방향은 출가수행자는 붓다의 삶으로, 종단은 승가공동체의 전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불자들 모두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도 부처님이 하셨던 그 방식대로여야 한다. 먼저 삶으로 보여주고, 공동체에서 구현하는 그 방식, 그 것이 아니면 안된다. 왜 부처님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를 오역죄(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대역죄)라고 하셨는지, 요즘처럼 실감난 적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