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선씨가 농촌체험마을의 운영위원장을 거쳐 대표를 맡은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을은 연간 8천여 명의 방문객이 꾸준히 찾는 곳이 되었고] 마을 전체의 민박 소득, 체험활동 소득과 농산물 판매로 마을 전체의 수익은 연간 5천만 원에 달한다. 민박에 참여하는 농가가 20여 개인 것에 비하면 아직 적은 수익이지만 마을의 관광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이강선 씨를 비롯해 헌신적인 농민들이 앞장 선 덕에 마을 주민들의 삶에도 활기가 넘친다. 이강선 씨는 마을의 변화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처음 시작할 당시 냉소를 보낸 마을 사람도 있었고 지원금에 대한 오해로 일부 주민이 운영회에서 탈퇴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수고를 인정하는 사람도 많았다.현조마을 염경석 이장은 이강선 씨를 찾아 슬며시 어깨를 두드려 주곤 했다. 주민들이 수고한다는 말 한마디 전해줄 때 이강선 씨는 마음의 상처가 씻기는 듯 위로를 얻었다.
5남매가 농촌에서 대가족을 이룰 날을 꿈꾸며
이강선 씨의 5남매는 전부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학교성적 문제 등에 일절 간섭한 적 없는 아버지 덕에 모두들 자율적인 청년들로 자라주었다. 이강선 씨의 가장 큰 걱정은 자녀들이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5남매 중 결혼한 자녀는 셋째 딸 선남 씨뿐이다. 농촌을 떠나 살면서 홀로 사는 것에 익숙해 진 것은 아닐까. 셋째 딸 이선남 씨는 농촌에서 수고한 부모님의 노고에 안쓰러운 마음뿐이다. 어머니가 아프신 뒤 도시에서 어머니를 모시며 치료를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지만 아버지가 발로 뛰어 마을을 멋지게 일으킨 것은 정말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고 귀촌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이강선 씨는 언젠가 가족을 이루고 귀촌하겠다는 자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우리 아버지만 해도 돌아가실 때까지 제가 귀촌 할 거라곤 생각 못하셨던 것 같아요. 유언도 대부분 도시생활에 대한 염려 뿐 이였죠.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상당히 놀라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도 자기 길을 가다 언젠가 저처럼 시골 생활을 선택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농촌에서 아이들과 노인들이 복작대며 사는 소박한 꿈, 우리 마을을 통해 언젠가 이뤄지겠지요?”